"아주 우울한 크리스마스만 아니어도 다행입니다" "크리스마스가 즐겁지 않더라도 설이 있으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같이 보낼 애인이 없는 크리스마스도 견딜 만합니다. 인생은 어차피 외로운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식의 구체적이면서도 진솔하고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크리스마스 멘트는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지구상에 진짜 '메리'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려봐도 정말 즐거웠던 크리스마스는 한 번 정도밖에 없었다. 군대에서 성탄절 특식이 나왔을 때….
서론이 길었지만, 나는 크리스마스 이데올로기에 아주 전폭적으로 딴지를 걸어볼 작정이다. 그래서 난 <그린치>라는 영화에 불만이다. 언제나 불만에 차 있는 괴물 같은 녀석 그린치는 마을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랍시고 산더미처럼 선물을 쌓아놓고 캐롤을 부르는 게 너무 마음에 안 든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의 선물을 모두 훔치기로 작정하고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아, 영화가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그린치는 꼬마아이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 받고 개과천선해 마을 사람들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동참해버리고 만다.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의 악몽>의 그로테스크하고 악취미적인 세계에 비하면 '나이브'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고 제목 값도 못하는(이 영화의 원제는 '그린치는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훔쳤는가'이다) 영화였다.
그래서 <나 홀로 집에>도 약간은 아쉽다. 이 영화는 잘하면 크리스마스 이면에 존재하는 고독감을 훌륭하게 형상화할 수 있었다. 맥컬리 컬킨만을 집에 놔두고 여행을 떠나버린 식구들. 집에 혼자 남은 아이. 이것은 현대사회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실적 상황이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그 아이의 상실감을 드러내기보다는 불쌍한 두 명의 도둑을 제물로 '키드 액션' 한 편을 만들어냈다. 아이는 크리스마스를 전혀 심심하지 않게 보내고, 결국 부모님 품에 포근히 안긴다.
같은 맥락에서 <다이 하드>도 아쉽긴 마찬가지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죽도록 고생한다는 아이디어는 높이 사줄만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가족을 구출하고, 결국은 더욱 감동적인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지 않는가?
하지만 나의 이런 불만을 만족시켜주는 영화가 있으니 바로 <그렘린>이다. 조 단테 감독은 어떻게 되어먹은 작자인지, 해피엔드나 '남 잘 되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한다. 엄청난 번식력을 자랑하는 그렘린 수천 마리는 마을을 장악해 버리고 여기저기서 난장판을 벌인다. 그 시기는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시즌. 이 영화를 보면서 감히 '메리 크리스마스' 같은 낯간지러운 인사말을 건네지는 못할 것이다.
너무 삐딱한 이야기만 늘어놓은 것 같다. 실제로 크리스마스를 즐겁고 알차게 보내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사랑의 금고털이>의 두 부부처럼 이상한 과정을 통해 화해를 이루고(도둑이 두 부부를 화해시킨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처럼 재회의 계기가 되기도 하며, 다소 유치한 영화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처럼 첫사랑을 이루기도 할 텐데… <솔드아웃>의 아놀드 슈왈제네거처럼 아들한테 장난감 하나 사주기 위해 목숨 거는 아버지도 있고, <34번가의 기적>처럼 인자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있는데….
그래서 난 <멋진 인생>을 사랑한다. 가장 미국적인 감독으로 일컬어지는 프랭크 카프라의 대표작이며 스필버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알려진 <멋진 인생>은 크리스마스에 자살을 기도하는 남자 제임스 스튜어트가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은행이 파산 직전에 이르자 자살을 결심한다. 그때 다소 어리숙해 보이는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알고 보니 천사다. "자네가 없는 세상이 어떤지 보여주지." 천사는 주인공을 이끌고 그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세상이 어땠을 지를 환상처럼 보여준다. 주인공은 다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마을 사람들의 작은 도움으로 다시 은행을 살린다. 이 영화의 교훈은 "친구가 있는 자는 결코 실패가 없음을 기억해라."
당신 곁에도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낼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꼭 곁에 있지 않고 마음 속에라도 있다면 '메리 크리스마스'는 아니어도 최소한 '블루 크리스마스' 정도는 되지 않을까? 흥청망청 돌아가는 연말에 진정 필요한 사람은 '왁자지껄한 술친구'가 아니라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 누구일지도 모른다.
김형석(영화칼럼리스트) woodyme@han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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