惡―싫어할 오 悲―슬플 비 庸―어리석을 용
劣―못난 열 陳―낡을 진 腐―썩을 부
造物主가 부여한 인간의 감정 중에 喜怒哀樂(희로애락)이 있다. 여기에다 愛惡欲(애오욕)을 덧붙여 ‘七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서는 그냥 喜悲(희비)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왕 造物主가 부여한 性情이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렷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늘 좋은 일만 있으란 법은 없다. 살다 보면 누구나 喜怒哀樂을 두루 경험하게 되어 있다. 그게 사는 맛일 수도 있다. 흰색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검은색이 있기 때문이며 긴 것은 짧은 것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늘 좋은 일만 있다면 오히려 삶이 따분해질 수도 있다. 변화나 자극도 때에 따라서는 필요한 법이다.
매년 이맘 때면 느끼는 것이지만 지난 한 해에도 국가적으로 喜怒哀樂이 많았다. 남북이산가족의 상봉이 민족적 慶事였다면 어두운 경제는 또 그만큼 우리에게 苦痛을 안겨주었다. 그 고통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으며 역사의 수레바퀴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굴러가고 있다. 특히 진정한 21세기로 들어서는 지금은 더 없이 중요한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세계 각국이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 있는 것이다.
諸子百家의 사상 가운데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것이 儒家와 法家였다. 그야 말로 氷炭不容(빙탄불용·얼음과 숯불은 용납될 수 없음)의 관계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립되는 주장을 펼쳤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역사를 보는 눈, 곧 歷史觀이다. 儒家가 과거에 초점을 맞춘 ‘復古’를 주장한 데 반해 法家는 진보적인 史觀을 가지고 ‘改革’을 주장했다. 韓非子가 變通없이 庸劣(용렬)한 그들을 두고 ‘守株待兎’(수주대토)라고 비난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 우리는 눈의 초점을 지나간 역사에만 맞추어 둘 수는 없다. 역사는 龜鑑(귀감)으로 삼을 수 있을 뿐이다. 그것보다 21세기 새 시대에는 그에 걸맞은 새 역사를 창조해야 할 무거운 사명이 우리들 어깨에 얹혀져 있다.
送舊迎新의 자세가 필요하다. 낡은 것은 과감히 털어 버리고 새로운 것을 준비해야 한다. 혹 아쉬운 것이 있었다면 반성을 통해서 바로잡아야 할 것이며 부족했던 것은 그 만큼 더 노력해 보충하도록 하자. 그렇지 않고 옛 것에만 집착할 때 우리는 陳腐(진부)를 면치 못할 것이다.
鄭錫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email.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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