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러한 '일상의 존재론'은 몇 줄의 글로 풀어내기에 너무나 거대한 철학적 테마다. <사랑의 블랙홀> 같은 영화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끊임없이 전진하며 반복되는 24시간은, 그 안에 거주하는 주체인 '인간'이 변하기 전에는 무의미할 뿐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자고 일어났을 때 가장 황당했을 법한 사나이는 <패밀리 맨>의 니콜러스 케이지다. 스크루지 이야기와 프랭크 카프라의 <멋진 인생>을 슬쩍 빌려온 <패밀리 맨>은, <슬라이딩 도어즈>의 '인생 극장'처럼 삶의 두 가지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크리스마스에도 직원회의를 소집하는 냉혈한 니콜러스 케이지. 사랑이나 가족의 소중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에 깨어보니 그는 두 아이의 아버지며 한 여자(옛 애인)의 남편이 되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처음에는 도저히 적응하지 못했던 그는 가족 구성원 역할에 점점 익숙해지고, 결국 가족 없이는 도저히 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꿈이었고 '가족의 가치'에 완전히 감화된 그는 그 꿈속으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다.
자고 일어났더니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뀌어 있다? <왓 위민 원트>(2001년 1월13일 개봉)의 멜 깁슨도 예외는 아니다. 전기충격을 받고 쓰러진 다음날 아침, 그는 초능력자가 되어 있다. 여자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들을 수 있게 된 멜 깁슨. 하지만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 특히 그처럼 남성 중심적 사고에 길들여진 '마초'에게는. 여기저기서 재잘대는 여자들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듣게 된 멜 깁슨은 자신에 대한 악담을 접하면서, 처음에는 무척이나 당황했지만 나중에는 그녀들을 이해한다.
<왓 위민 원트>가 너무 허무맹랑하다고? 그렇다면 황당함의 진수 <빅>이 있다. 조슈아는 키가 작은 탓에 놀이공원 청룡열차도 못타는 꼬맹이다. 아이의 소원은 빨리 어른이 되는 것. 누구나 자라면 어른이 되겠지만 조슈아의 경우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고, 그래서 톰 행크스는 12살의 지능에 어른의 몸을 가진 이상한 존재가 된다. 몸은 어른이지만 장난감 더미에 파묻혀 허우적대는 그 녀석은 결국 다시 아이의 몸으로 돌아가고 '어른 조슈아'를 사랑했던 여자는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아이의 간절한 소원은 자신이 아닌 타인마저 변화시키는가 보다. <라이어 라이어>에서 생일을 맞은 아이는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변호사 아버지가 정직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생일 케이크 촛불을 끄며 기도한다. 그날도 아빠는 생일 파티에 온다고 하곤 안 왔다. 거짓말쟁이 짐 캐리는 졸지에 '참말쟁이'가 되었고 맘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는다. 위에서 얘기한 영화들이 모두 이전 상태로 돌아온다면, <라이어 라이어>의 특징은 변화가 그대로 지속된다는 점. 만약에 짐 캐리가 다시 거짓말쟁이로 되돌아간다면 그 아이의 가슴엔 큰 멍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룻밤 자고 나니…' 영화 중 가장 애절하면서도 인상적이었던 영화는 <사랑의 은하수>(Somewhere in Time)이다. 왕년의 '슈퍼맨' 크리스토퍼 리브가 주인공인 이 영화는 시간을 뛰어넘는 사랑의 판타지와 그 불가능성을 동시에 말한다. 이상한 사랑의 인연을 감지한 그는 어느 호텔 방에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시도한다. 과거의 옷을 입고 과거의 물건을 갖다놓고 과거를 생각하고….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얘기겠지만, 침대에 누워 있다가 눈을 뜬 그는 어느새 과거로 왔고, 어느 여인과 사랑을 나누지만 사소한 실수 때문에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과거의 사랑을 가슴에 품은 채 하루하루 시들어가는 크리스토퍼 리브…. 그 '깊은 슬픔'은 헤아릴 길이 없다.
김형석(영화칼럼리스트)woody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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