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식의 과학생각]기술 진보는 만능 아니다

  • 입력 2001년 1월 3일 19시 17분


연말연시에 세월의 덧없음을 느낄 적마다 나무연필의 운명을 생각하곤 한다. 적어도 400년 전부터 인류의 문화 발전에 큰 몫을 한 연필이 새로운 필기도구들, 예컨대 만년필 샤프펜슬 볼펜 타자기 워드프로세서 등의 도전을 줄곧 받아왔기 때문이다.

1938년 뉴욕타임스지 사설은 타자기가 연필을 몰아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 미국의 연간 연필 생산량은 무려 20억 자루나 됐다. 1980년대부터 퍼스널컴퓨터가 연필의 종말을 재촉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근본적인 것들엔 큰 변화 없어▼

‘연필’(1989년)의 저자인 헨리 페트로스키 교수는 연필의 몇가지 이점, 이를테면 지울 수 있고 전기가 필요없고 무엇보다 값싼 장점 때문에 최소한 20년 동안은 수요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필처럼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종말이 임박했다는 선고를 받은 것들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책과 현금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정보기술 전도사로 자처하는 니클로스 네그로폰테 교수는 종이책이 전자책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러나 앞으로 20년 이내에 전자책이 가볍고 튼튼하고 값싼 종이책의 장점을 따라잡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현금 역시 스마트카드와 전자상거래의 보급으로 쓸모가 줄어든다는 주장이 속출하지만 적어도 수십년 동안 현재와 비슷한 수준으로 통용될 것 같다. 현금의 존속을 전망하는 학자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장점 때문에 현금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과 상자에 돈다발을 넣어 뇌물로 상납해본 사람들이라면 무슨 뜻인지 얼른 이해가 갈 것이다.

정보기술 못지 않게 생명공학도 많은 약속을 하고 있다. 가령 2020년경에는 태아를 어머니 몸 밖에서 발육시킬 수 있는 인공자궁이 개발된다. 또 유전자를 조작해 맞춤아기를 만들 수 있다. 이처럼 수정에서 출산까지 생식과정이 침실보다 시험관에서 이뤄질 수 있으므로 부모의 역할이 실종되는 것은 물론이고 생식과 섹스가 완전히 분리된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적지 않다. 자식을 낳기 위해 구태여 성행위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섹스는 오로지 쾌락을 추구하는 오락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식은 사랑의 열매일진데 어느 부부가 시험관 아기를 선호하겠는가. 성교는 맞춤아기 기술보다 구태의연한 생식기술일지 몰라도 연필 종이책 현금처럼 2020년경에도 여전히 아기 만드는 기술로 살아남을 터이다.

생명공학의 최대 약속은 질병 치료와 수명 연장이다. 2020년경에는 유전자 치료로 당뇨병 혈우병 고혈압 등의 만성질환을 완치할 뿐만 아니라, 유전자 검사로 특정 질병에 걸리기 쉬운 유전적 소인을 미리 알게 되므로 질병 예방이 가능해진다.

또한 노화의 속도를 결정하는 유전자를 찾아내 젊음을 연장하고 노화를 지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유전자를 찾고 있는 과학자들은 우리 후손들이 200세까지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명 연장으로 여러 가지 부작용이 예상된다. 인구의 노령화로 젊은이들이 부양해야 되는 노인의 수가 급증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늘어난 노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들을 돌보는 문제가 대두할 것이다. 오래 산다는 것은 사회적 약자인 노인들이 외로움과 무력증을 감내해야 하는 시간이 그만큼 증가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에 빠진 노인들이 많아지고 자살하는 비율도 높아질 것 같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에서 21세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가능성이 높은 3대 요인으로 심장병 교통사고와 함께 우울증을 꼽은 대목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종교의 영향력 허물지 못할 것▼

이처럼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므로 과학기술의 진보가 종교의 영향력을 허물어뜨리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2000년에 세계 인구의 33.4%를 차지한 예수를 믿는 사람은 2025년에는 35.5%로 큰 변화가 없을 것이며 다른 종교는 물론이고 무신론자 비율도 마찬가지이다.

21세기에는 정보기술과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에 변화가 일어날테지만 연필 책 돈 섹스 노화 종교처럼 근본적인 것들은 가령 20년 뒤에도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누가 과학기술의 진보를 두려워하는가.

이인식(과학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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