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포럼]안병영/남북문제 공론의 장 열자

  • 입력 2001년 1월 4일 18시 50분


1960년대 말 서독에서 동방정책이 움틀 때 당시 시사주간지 디 차이트의 발행인이던 뒤엔호후 여사는 ‘세상에는 온통 몽상가(夢想家) 아니면 냉전주의자들 뿐이다. 그 사이의 넓은 길목은 텅 비어 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요즈음 우리의 경우도 비슷한 양상이 목도된다. 김대중 정부가 명운을 걸고 추진하고 있는 햇볕정책의 경우도 언론에 비치기는 양극은 있으되 건강한 중도(中道)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양극의 중간에 있는 그 넓은 길목에 많은 생각이 모일 때, 다시 말해 ‘사회적 합의’가 형성될 때 비로소 갈등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다고 생각한다.

▼건강한 中道의 목소리는 없어▼

사회적 합의는 그냥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그 사회에 언론자유와 다원적 가치, 그리고 비판적 지성이 살아 숨쉬어야 한다. 그것이 사회적 합의 형성의 요람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회적 합의 형성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에 바탕을 두어 정책을 관리하는 정부의 국정운영 능력이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 우리의 경우 위의 두 가지 요소가 다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부쩍 많은 사람이 이 사회에 정론(正論)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요즈음 ‘국민의 정부’가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정부가 남북문제와 같은 중요 정책 쟁점에 대해 사회적 합의 형성을 구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소홀히 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

남북문제는 원래 두 가지 얼굴을 하고 있다. 하나는 민족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현실적 차원이다. 전자는 다분히 이상추구적이며 체제초월적인데 반해, 후자는 보다 현실적이며 체제수호적이다. 두가지 차원은 본질적으로 상충된다. 그런데 남북관계의 개선은 어차피 이상과 현실의 변증법적 통합과정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정부는 단계마다 국민과 깊숙이 교감하면서 위의 두 가지 차원을 적절하게 조율하는 정책적 슬기를 발휘해야 한다.

김대중정부는 남북화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햇볕정책의 앞길에 추호의 지장도생겨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듯하다. 6·25전쟁 이후 한국사회에 뿌리박힌 냉전이데올로기를 넘어 과감하게 햇볕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 무언가 ‘돌파’의 측면이 필요하다는 점을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독선적 통일정책 관리로 이어지고 사회적 합의 형성을 등한시할 때 문제는 심각하다.

무엇보다 행여 북한의 비위에 거슬릴까 고심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런 정부의 의도는 그대로 언론에 투영돼 북한의 실상이 가려지거나 미화되기 일쑤였고 은연중에 북한의 인권이나 민주화 논의는 반통일론으로 금기시되는 분위기마저 연출됐다. 정부의 이런 정책관리에 힘입어 체제가치보다 민족과 통일을 앞세우는 한국형 진보주의의 목소리는 크게 증폭됐으나 이에 대해 수구적 보수주의의 반격이 있을 뿐 건강한 중도의 목소리는 숨을 죽이는 형국이 초래됐다. 남북관계와 연관해 중도의 침묵, 정론의 실종이 오늘 한국 지식인 사회의 두드러진 단면이다. 많은 국민이 햇볕정책에 회의하고 점차 등을 돌리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국민의 정부가 민족화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동의를 구해가며, 그 방향을 정하고 강도와 속도를 조절한다면 혹 다른 정권이 들어서도 그 정책기조나 기본적 궤도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가치혼란이 계속되면 정권이 교체될 경우 다음 정권이 대대적인 반전(反轉)을 시도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정책 일관성 확보에도 필요▼

그렇게 되면 그동안 힘들여 쌓아올린 남북화해의 분위기는 하루아침에 냉각되고 남북한간의, 또 남남간의 불신의 골은 오히려 햇볕정책 이전보다 더 깊어질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정책만이 다음 정권에서도 승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될 것이다.

이제 정부가 앞장서서 공론의 마당을 활짝 열어야 한다. 또한 여기서 자유롭게 분출되는 주장과 논쟁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적 합의의 내용이 추출돼야 한다. 아울러 북한에 이러한 공론화 과정은 정부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우리 체제의 ‘성역’이라는 점을 바르게 이해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안병영(연세대 교수 ·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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