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전 1900년대 한국 사회는 나라가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대내외적으로 위기가 팽배한 만큼 극복을 위한 노력도 어느 때 못지 않게 컸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당연히 해외 문물을 받아들이며 부국강병책을 모색하였고, 그 일환으로 여성의 교육과 사회적 힘이 새롭게 인식되었다.
이 때 사회의 또 다른 중요한 현상 중 하나가 바로 해외로 살길을 찾아 나가는 이주민이었다. 그 중에는 큰 뜻을 품고 국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며 유학의 길에, 또는 독립운동의 길에 오른 경우도 있었지만 단지 살기가 너무 어려운 민중이 만주로, 하와이로 신천지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
미국이민은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에 65척의 선박에 7226명의 한국인이 건너간 것으로 시작되었다. 기독교 신자와 부두 노동자 등의 이민 희망자들이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를 떠나 일본 고베에서 신체검사를 통과한 남자 55명, 여자 21명, 어린이 25명이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이 본격적인 한인 이민의 첫걸음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이민은 농민이 주류를 이룬 데 비해 한국인 이민은 이미 도시에서 품팔이 노동을 하다 건너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하와이 사탕 수수 농장에서 10시간 이상의 일을 하고도, 극도의 저임금은 물론 백인 등 외국인 감독의 압박과 횡포에 시달리며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그들의 새 삶에의 꿈은 무지막지한 노동과 인종 차별로 말 그대로 참혹하고 비참하게 짓밟혔다. 결국 단신으로 건너간 노동자들은 술과 노름, 아편 등으로 자신을 더욱 망가뜨리고 마침내 그 사회의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었다. 1905년 현재 하와이 한인 이민은 남자 7000명에 여자 700명으로 노총각 문제가 무엇보다 심각했다.
▼미지의 세계로 발걸음을 돌린 여성들▼
미국은 이같은 아시아계 노동자 문제 해결책의 하나로 사진혼인법을 채택, 사진혼인을 위해 미국에 들어오는 여성에게 영주권을 주었다.
사진혼인이란 고국의 여성에게 사진과 편지로 청혼한 후 사진신부가 건너오면 혼례를 올리고 안정된 가정, 안정된 사회생활을 기대한 것이었다.
사진혼인 입국은 1908년부터 시작되어 1924년 동양인배척법으로 아시아계 이민이 중단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신천지로 가고 싶은 여성들은 사진을 주고받으며, 상대 남성을 찾기도 하였다. 중매 역할은 주로 교회 목사나 친구, 친척이었는데 때로는 사기혼인을 당하는 일도 없지 않았다.
사진신부가 사진 한 장만을 들고 중국 또는 일본을 통해 미주까지 가는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그래도 공부하러, 또는 돈벌러, 한국의 가난과 여성 억압이 지긋지긋하게 싫어서 등등의 이유로 당찬 여성들은 미지의 세계, 미지의 사진신랑을 찾아 하와이 또는 미주 본토로 건너갔다.
1910년 11월 하와이에 도착한 최초의 사진 신부 최사라를 비롯하여, 1916년의 김도연, 이살로매, 백인명, 옥성금 등, 그들의 나이는 평균 15, 6세였으나 20세 이상일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신랑과의 나이 차이가 평균 15세였고, 그보다 최고 25세나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미국의 풍습대로 남편의 성을 따랐고, 이들에 의해 미주 지역에 한국인 노동자 가정은 서서히 정착돼 갔다.
이민 생활에 지친 남자들은 가끔은 고국으로 되돌아가기도 하였지만 여자들은 이를 악물고 그곳에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사진 신부들은 주로 기독교 가정의 출신에 웬만큼 교육받은 여성이 많았고, 비교적 의식이 앞선 여성들이었다.
물론 부모나, 교사 등 주변의 반대도 적지 않았으나 꿈이 있고 호기심 많은 깨인 여성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의지를 꺾지 않고 실현시켰다.
중국까지 갔다가도 배를 못타 되돌아오기도 하였으나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하여 끝내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의 까다로운 심사 절차도 거친 후 사진 신랑을 만나 새로운 생활을 개척해 나갔다.
▼못다 이룬 꿈과 이민사회의 정착▼
대부분의 사진 신부들은 자신의 이상과는 엄청나게 다른 어려운 생활을 겪고 헤쳐나가야 했다.
공부나 돈벌이는 커녕 하루하루 생계 유지에 급급한 생활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커피나 과일농장 등지에서 남자 못지 않게 노동을 하였고, 미국인 가정의 가사 봉사, 세탁소와 간이 식당, 과일상 등을 전전하며 끊임없이 일하였다.
자신의 꿈을 대신 이뤄줄 자녀들의 보다 나은 교육 환경을 찾아 도시로, 도시로 진출해나간 것이었다. 즉 하와이 이민들은 오렌지 농장, 철도와 광산, 도시의 아파트나 가옥관리, 식당 등 일자리를 찾아 1904년부터 1907년까지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미국 서부 지방으로 뻗어갔다.
그리고 1920년 호놀룰루시에서 잡화상, 양복점, 여관, 약상, 제화업, 가구상 등의 사업종사자는 사탕수수농장 노동자에 비해 아직은 소수였지만 도시에 생활기반을 마련하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사진 신부들은 대체로 남편보다 교육수준이 높았고 또한 젊어서 도시에 나가 하숙을 치고 아파트를 관리·경영하는 등의 일에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들은 피와 땀으로 가정을 일구고, 자신의 못 이룬 꿈을 자녀들이 실현해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미주의 대한여자애국단 한인부인회 하와이의 부인구제회 등을 조직해 한인 사회를 형성, 인종 차별을 극복해나가기도 하고 상호 위로와 친교, 상부상조하는 봉사활동도 시작하였다.
보다 더 힘이 커지면 독립운동 자금도 모아 고국에 보내기도 하고,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출전 군인 환송, 가족 위문 등도 이들이 하는 일 중 하나였다. 이렇게 사진 신부들은 자녀교육과 한국인 이민사회의 정착에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그들은 거의 한번도 고국에 다시 와보지 못한 채 그곳에 자신을 묻고 그 대신 오늘의 미주 한인 사회의 건설에 밑거름이 되었다.
정말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는 것을 실증해 보인 것이다. 다만 지금도 그들의 존재가 역사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글은 신영숙씨가 한국여성민우회의 웹진 '함께가는 여성'에기고한 내용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신영숙:한국 근대 여성사 공부를 하며, 언제나 역사와 여성· 민족과 여성·통일과 여성 등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정신대연구소에서도 후배들과 함께 열심히 일하며 즐겁게 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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