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공개 전단계에 있는 이들 벤처기업을 새로운 성공의 길로 이끄는 기업들이 있다. 이른바 ‘필러(pillar)컴퍼니’. 바로 영양가 있고 가치 있는 벤처기업을 삼키는 대기업. 벤처의 싹을 키우고, 벤처기업이 필요로 하는 전문경영인을 배출하며, 벤처기업을 되사기도 하는 이들 기업은 초우량 대기업이면서, 벤처기업의 강력한 후견인이다.
성공적인 벤처생태계의 뒤에는 반드시 ‘필러컴퍼니’가 함께 있다. UPS, 보잉, 컴팩, 휴렛팩커드, 시스코 시스템스, 마이크로소프트, IBM이 그 대표적인 예. ‘필러컴퍼니’의 수장격인 시스코 시스템스도 한때는 벤처기업이었다. 인터넷 라우터를 생산하는 이 회사는 벤처기업에 대한 왕성한 식욕으로 유명하다. 공개자료에 의하면, 96, 97년에 각각 7개, 6개이던 연간 인수기업수가 98년에 9개, 99년에 18개로 늘더니, 2000년에는 무려 23개를 기록하였다. 가히 벤처기업의 블랙홀이라 할 만하다.
‘필러컴퍼니’의 존재는 e비즈니스 시대 실리콘밸리의 필수적인 성공요인이다. IPO의 낮은 성공률을 감안할 때, ‘필러컴퍼니’없이 실리콘밸리 생태계가 선순환의 균형을 이룰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벤처생태계가 그 건강을 유지하는 생존율을 40%쯤으로 잡는다면, 어림잡아 20% 이상의 벤처기업은 이들 ‘필러컴퍼니’에 의해 소화되어야 한다.
벤처기업을 수만개 양산하는 것만으로 벤처생태계가 세워지지는 않는다. 벤처기업을 고수익 투자상품쯤으로 인식하는 대기업만 있다면, 벤처생태계의 유지는 어렵다. 벤처기업과의 융합을 통해 벤처정신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이들 ‘필러컴퍼니’야말로 벤처생태계뿐만 아니라, e비즈니스의 신경제를 지탱하는 기둥(pillar)이다. 이들은 대기업의 겉모양을 하고 있으나 머리와 가슴은 영원한 벤처기업이다.
e비즈니스 시대에 우리 대기업이 추구해야 할 모습은 바로 벤처의 피를 섞어 올바른 벤처정신으로 무장한 ‘필러컴퍼니’이다.
<장석권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스탠퍼드대 교환교수> changsg@stanford.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