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산업은행 회사채 인수 부작용

  • 입력 2001년 1월 7일 17시 59분


산업은행이 8일부터 현대전자를 시작으로 비우량 회사채 인수에 나서면서 기업들 사이에 구조조정은 뒤로 미룬 채 정부지원에 기대려는 도덕적 해이 현상이 시작됐다.

정부와 산업은행은 이에 따라 선별 기준 마련에 고심하고 있지만 부작용을 없앨 수 있는 기준을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이다.

▽무임승차하려는 기업들〓산업은행의 오규원(吳圭元)이사는 7일 “회사채 신속 인수 제도가 발표된 이후 굳이 지원을 받을 필요가 없거나 해당 사항이 없는 부실기업들이 ‘무임승차’하려는 로비전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S사 등 일부 우량업체와 M사 등 꽤 알려진 벤처기업들도 이번 조치를 통해 올해에 만기 도래하는 회사채를 차환 발행할 생각으로 채권은행들을 접촉하고 있다는 것.

기업들이 이처럼 민감한 것은 얼어붙은 회사채 시장에서 차환발행이 가능하다는 것 뿐만 아니라 차환발행시 시장 금리보다 싼 금리를 적용하는 ‘이중혜택’을 주기 때문. 8일 산업은행이 첫 인수하는 현대전자 회사채의 차환발행 금리는 시장에서 유통되는 14% 내외보다 낮은 11.1%로 결정돼 현대전자는 연간 520억원의 이자부담을 덜게 됐다.

더욱 큰 문제는 채권단과 재무구조개선약정 등을 맺고 자구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해야 할 기업들이 구조조정 의지가 급격히 퇴색되고 있다는 점.

30대 그룹의 하나인 c그룹 관계자는 “요즘 다른 기업체 자금 담당자와 만나면 최대의 화제는 ‘어떻게 하면 산업은행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느냐’이다”라며 “비빌 언덕이 생겼고 최근 정부가 경기진작 정책을 펼 것으로 생각해 자구노력은 뒷전으로 밀린 분위기”라고 말했다.

은행권 관계자는 “1년간 유동성위기를 겪었던 현대건설도 구조조정을 회피해왔는데 정부가 현대전자 문제를 이렇게 쉽게 해결해주면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뤄지겠느냐”고 지적했다.

▽현대를 위한 제도인가〓시장 관계자들은 산업은행의 이번 ‘회사채 신속 인수 제도’의 대상에 4대그룹이 포함된 것에 주목해왔다. 산업은행 회사채 인수분의 상당 부분을 이들이 차지할 가능성 때문이었다.

실제 1월중 산업은행이 인수하기로 결정한 6개업체의 회사채 8400억원중 현대 계열 및 관계사(현대전자, 현대건설, 현대상선, 고려산업개발)의 회사채가 86%(7920억원)를 차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금융권에서는 이번 조치가 ‘현대를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현대전자 건설 상선 등 3개 계열사의 올해에 만기 도래하는 회사채가 6조4000억원, 쌍용그룹이 1조2115억원이나 되는 상황에서 대그룹에 지원이 편중될 경우 235개 대상기업 중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을 전망이다. 재정경제부는 4일 산업은행이 향후 인수할 회사채는 5조∼10조원 수준이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역차별 문제〓이처럼 일부 대기업의 회사채가 시장에서 대규모로 소화되면 금융기관 인수여력이 줄어들어 정작 우량기업들은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진다. 역차별이다.

알리안츠투신운용의 홍완선(洪完善)이사는 “선별 기준을 어떻게 정하든 인수 업체 선정을 놓고 논란이 지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주은투신운용 신세철(申世哲)상무는 “한정된 재원이 엉뚱한 기업을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며 “또 일단 회사채 인수를 한 뒤 자구노력을 강제하는 것 보다는 이자보상배율 등 일정한 기준을 정해 최소한의 자구노력 의지가 보일 때에만 지원을 해주는 방안도 적극 검토해야한다”고 말했다.

<박현진기자>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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