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를 통해 한국축구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많지만 더 중요한 건 ‘도로 위의 월드컵’이다. 생명 및 재산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외국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도로 위의 월드컵을 이대로 치를 순 없다’는 인식이 절실한 시점이다.
교통캠페인 취재 차 95년 12월 말 일본에 갔을 때의 얘기다. 일본 총무청, 운수성, 경찰청 관계자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두웠다. 88년 이후 1만명을 넘어선 교통사고 사망자가 95년에도 비슷한 추세를 보일 것이라는 예상 때문.
교통사고 사망자 1만명은 한국과 일본이 비슷한 수준이지만 자동차 수를 감안하면 한국의 피해율이 일본보다 7, 8배 높다. 그런데도 일본은 한해에 1만명 이상이 교통사고로 숨진다는 사실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받아들였다.
중의원이 ‘교통사고 희생자를 한 사람이라도 줄이는 것이 국민적 긴급과제’라고 결의하자 경찰청장이 유감을 표명한 뒤 지역실정에 맞는 대책을 강력히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일본 언론은 사망자가 1만6000명을 넘던 70년대 초를 빗대 ‘2차 교통전쟁’이라고 표현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당시 총리 역시 “인명피해가 계속되는 점에 대해 통석(痛惜)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국가적 차원의 노력은 곧바로 효과가 나타났다. 교통사고 사망자를 96년에 9942명으로 묶고 9640명(97년)→9211명(98년)→9006명(99년)으로 줄인 것.
한국은 어떤가. 91년에 사상 최고(1만3429명)를 기록한 사망자가 95년 1만323명 등 해마다 조금씩 감소했다. 경제난으로 자동차 이용률이 줄어 98년에는 사망자가 9057명으로 떨어졌다. 정부는 “선진 교통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했다”며 안심했다.
이같은 낙관적인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99년에 사망자가 9353명으로 늘었다. 지난해는 1만500∼1만1000명으로 추정된다. 피해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한해에 40만명이 다치고 사회경제적 손실은 8조원. 1분16초마다 1명이 죽거나 다치며 1164만원을 버린다는 계산이다.
대한손해보험협회가 지난해 11월 교차로 통행방법을 위반한 차량비율을 조사한 결과 서울 부산이 도쿄(東京) 오사카(大阪)보다 13배나 높았다. 끼어 들기 금지도 마찬가지였다.
교통사고와 이로 인한 피해규모가 계속 늘어나는 이유는 정부가 사실상 손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여야 정당대표, 국무총리, 건설교통부 장관, 경찰청장 등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높은 분들’이 상대적으로 안전에 무관심하다.
윗사람이 신경 쓰지 않으니 교통법규 위반을 현장에서 지도해야 할 경찰이 손을 놓는다. 97년에 1255만건이던 경찰의 단속건수가 98년에 1067만건, 99년에 851만건, 지난해 상반기에는 396만건으로 해마다 줄었다.
법규위반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일부 경찰이 돈을 받는 등의 경우가 있었다. 그런 부조리는 없어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단속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데 경찰의 소극적인 단속으로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운전자가 증가하고 그만큼 사고가 늘어난다.
도로교통안전관리공단의 장영채(張永彩·경제학박사)연구원은 “정부가 교통안전정책을 전면 재검토해서 체계적으로 추진하되 인명피해가 많이 생기는 도로의 교통시설을 우선 고치고 속도위반 음주운전 등 악성 사고요인을 집중 단속하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대통령 취임 때마다 국민화합을 이유로 사면을 실시해 교통사고와 관련된 전과나 벌점기록을 없애주는 것도 문제. 운전자의 입장에서는 몇 년만 참으면 다시 운전면허증을 받을 수 있어 ‘악순환’이 계속된다.
안전생활실천시민연대 허억(許億)안전사업실장은 “선진국일수록 법과 질서를 지키는걸 당연시하고 이런 풍토를 정부와 지도층 인사가 앞장서서 만드는데 우리는 정반대”라고 지적했다.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는 교통안전 측면에서 우리에게 기회이자 위기이다. 정부와 국민이 지금처럼 안전문제에 소홀하고 법규를 무시하면 교통사고율은 계속 높아지고 그만큼 세계는 한국과 일본을 다른 눈으로 볼 것이다.
▼ 손해보험협회 박종익회장 ▼
동아일보와 함께 96년부터 교통캠페인을 벌여온 대한손해보험협회 박종익(朴鐘翊)회장은 내년 개최될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를 앞두고 교통 안전이 정부의 최우선 정책 과제 및 사회적 관심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통사고가 늘어난다는데 어느 정도인지요.
“99년 이후 급증 추세인데 작년에는 증가폭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손보협 통계를 보면 교통사고로 다치거나 숨진 사람이 99년에 약 70만명인데 지난해에는 이보다 10만명이 더 늘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자동차 1만대당 사망자가 일본의 7배 수준입니다.”
―손보협 회원사의 어려움이 클텐데….
“가입자한테 보험료 중 사고 보상금으로 지급하는 돈의 비율이 손해율인데 70%를 넘으면 보험사가 경영에 압박을 받습니다. 이 손해율이 98년 61.7%에서 99년에 72.9%로 늘었고 지난해에는 더욱 높았던 것으로 예상됩니다. 영업면에서 지난해 4∼10월에 1940억원 가량의 손실을 입은데다 증권시장 침체로 투자 수익도 악화돼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사고가 늘어나는 이유를 어떻게 보십니까.
“사회적으로 기초 질서를 지키겠다는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우선 정부가 소통 위주로 교통 행정을 하면서 지정 차로제를 폐지하고 도로별 제한속도를 높이는 등 규제를 완화한게 잘못입니다. 안전 문제에 대해서는 국민 불편을 이유로 규제를 완화해선 안됩니다. 불편함보다 안전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또 경찰은 법규 위반 단속에 소극적이고 국민은 적발됐을 때 자기 잘못을 탓하기보다 재수가 없어 걸렸다는 생각을 합니다.”
―준법정신이 가장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법치주의, 준법 풍토를 뿌리내리는데 정부가 확고한 의지를 보여야 하고 교통 안전정책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해야 합니다. 전시도 아닌데 한해에 80만명이 죽거나 다치고 8조원 이상의 사회 경제적 손실이 생기는데 통치권 차원에서 나서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올해 손보협이 펼칠 사고 예방 노력은….
“교통사고의 심각성과 폐해를 알리기 위해 대국민 홍보 활동을 대대적으로 벌일 계획입니다. 동아일보와 96년부터 교통캠페인을 함께 벌여 왔는데 지난해 공동 제정한 ‘교통안전대상’을 정착시켜 안전 문제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겠습니다. 전국적으로 전북의 사고율이 제일 높아 제가 도지사를 직접 찾아가 대책 마련을 건의한 일이 있습니다. 또 협회 직원들이 지방경찰청과 경찰서를 방문, 위문품과 교통안전장비를 기증하면서 지역별 사고 원인을 설명하고 사고 예방에 힘써 주도록 요청했습니다. 이런 활동을 더욱 활발히 할 계획입니다.”
―다른 단체와의 협조도 중요하다고 보는데요.
“지난해 9월 국무총리실 산하에 ‘안전관리개선기획단’이 만들어졌습니다. 선진국 수준으로 교통사고를 줄이겠다는 정부의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무원, 민관의 교통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며 업무에 최대한 협조하고 지원할 계획입니다.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 등 시민단체와도 적극 연대하겠습니다.”
―선진국에서 배울 점은….
“미국 영국 일본도 자동차가 늘어나는 시기에 교통사고가 급증했지만 정부 주도로 교통안전 종합대책을 세우고 법규 위반을 강력히 단속하면서 사고를 줄였습니다. 특히 법규 위반시 벌금이나 형사 처벌뿐만 아니라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봉사 활동을 시켜 법규 준수를 유도하는 정책을 배울 만하지요.”
―정부와 시민들에 당부하고 싶은 것은….
“월드컵 대회기간 중 50만명의 관광객이 한국을 찾아올 것으로 추산됩니다. 통계적으로만 본다면 교통사고로 이중 660명 이상이 죽거나 다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88서울올림픽의 경험을 살려 월드컵을 계기로 국민과 정부 모두 질서나 안
전 의식 측면에서 한 단계 성숙하길 기대합니다.”
<송상근기자>songm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