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남찬순/고어의 ‘뒷모습’

  • 입력 2001년 1월 8일 18시 25분


작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 ‘퇴장’하는 앨 고어 미국부통령의 ‘뒷모습’이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6일 조지 W 부시 대통령 당선자의 당선을 최종 인증하는 상하원 합동회의. 당연직 상원의장으로 사회봉을 잡은 그는 일부 민주당 하원의원들이 부시 당선자의 당선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자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며 기각했다. 그리고는 새 대통령과 부통령에게 신의 은총이 있기를 축원한다는 말을 남기고 기립 박수를 보내는 의원들 사이로 사라졌다.

▷이날 고어부통령의 심사는 어떠했을까. 미국 역사상 네 번째로 직접 투표에서는 승리하고도 백악관에 입성하지 못한 ‘불운한’ 후보자, 대통령 자리를 놓고 역사상 유례없는 한 달 이상의 법정 공방을 벌인 당사자, 당선자에게 건 첫 축하 전화는 취소했다가 다시 축하 전화를 해야 했던, 그리고 마침내는 그 당선을 인증하는 자리에 선 패배자…. 고어부통령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20여년 동안 엘리트 코스만 밟아 왔다. 그 탓인지 선거기간 중에도 너무나 정형화된 모범생이라는 평이 그를 항상 따라다녔다. 그런 고어부통령이기 때문에 스스로 패배를 시인하는 일이 남다르게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고어부통령에게는 다음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는 4년 후가 보장된 것도 아니다. 부시 당선자가 재선될 가능성은 제쳐놓더라도 민주당 내에는 이미 상당수 대선 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고어부통령이 자기를 지지하는 정치 세력을 계속 끌고 갈 수 있는 카리스마를 가진 것도 아니라고 한다. 전례를 보더라도 패배한 대통령 후보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고어부통령으로서는 어쩌면 자신의 정치 생명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질 만도 하다.

▷그러나 퇴장하는 그의 ‘뒷모습’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작년 12월 패배를 승복하는 연설에서도 “당파심이 애국심보다 앞설 수는 없다”면서 “결승선에 도달하기 전에는 무수한 논쟁이 오가지만 일단 결과가 정해지면 승자나 패자나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화합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선거 후에도 당파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사사건건 서로 물고늘어지는 우리네 정치인들의 모습에 비하면 고어부통령의 ‘뒷모습’은 정말 깨끗하다.

<남찬순논설위원>chans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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