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밑빠진 독' 공적자금 시리즈 ▼ |
- 국책은행이 나랏돈 주는 꼴 |
“특정기업을 염두에 두고 펴는 정책이 결코 아니다. 관치(官治)논란이 있는 줄 안다. 자생력을 상실한 회사채시장을 그대로 둘 수 없는 것 아닌가?”
지난해 12월 26일 재정경제부 기자실. 재경부 이종구(李鍾九)금융정책국장은 “회사채시장이 망가졌기 때문에 더 이상 놔둘 수 없어 산업은행을 동원, 기업 회사채를 일단 떠맡도록 하겠다”는 대책을 발표했다. 회사채 시장이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서 ‘특단의 대책’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한다 해도 너무나 많은 후유증을 잉태한 해법이었다.
▽또 다른 형태의 공적자금〓산업은행은 7일 1월중 만기가 돌아오는 현대전자 쌍용양회 등 6개 기업 회사채 1조520억원 어치의 80%를 인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중 10%만 산업은행 자체자금으로 대고 20%는 채권금융단이 떠맡는다. 나머지 70%는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CBO) 발행을 통해 조달하되 우선 한국은행이 환매채(RP)를 발행한 돈으로 지원한다.
재경부의 이 아이디어는 어떤 의미일까? 최중경(崔重卿)금융정책과장은 “아무도 회사채를 안 사가려는 상황에서 산업은행이 회사채 ‘임시 주차장’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채권시장이 물 흐르듯이’ 작동하도록 시설을 하나 만들어준 것일 뿐이라는 설명.
그렇다면 공적자금과는 다른가. 공적자금은 예금보험공사가 부실 금융기관의 부실을 없애기 위해 국민세금으로 조성하는 돈이다. 은행이나 종금 투신 등 금융기관들이 기업에 대출을 잘못해 손해본 것을 국민 돈으로 메워주는 것.
산업은행을 통한 회사채 인수제도는 굳이 ‘공적자금’이란 용어를 쓰지 않고도 똑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특히 CBO발행이라는 것이 쉽지 않은 현실에서 한은이 우선 이 돈을 마련해주기로 해 시작부터 공공의 부담을 전제로 한 것.
오규택(吳奎澤·경영학·한국채권연구원장) 중앙대교수는 “이 조치는 은행을 거치지 않고 기업에 공공의 돈을 직접 주는 조치”라고 말했다. 포장만 달리 한 ‘제2의 공적자금’인 것이다.
▽대우채권 처리와 닮은꼴〓99년8월 대우그룹 계열사가 워크아웃에 들어가자 투신사는 자사 펀드에 편입된 대우채권을 기간에 따라 50∼95% 지급보증했다. 일단 투신사가 투자자손실을 대신 떠맡은 셈. 은행권은 작년1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7조9000억원을 투신사에 출연하는 방식으로 투신사 손실을 메워줬다. 이 손실은 나중에 은행권에 2차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주요 이유가 됐다. 시작할 때는 ‘공적자금’이란 말은 없었지만 결국은 공적자금으로 부실이 해결된 것. 대우채가 먼저 밟은 길을 산은 회사채가 따라가고 있는 셈이다.
▽왜 편법공적자금을 동원하나〓이미 160조원(1차 110조원, 2차 50조원)의 공적자금을 만들었는데 또 공적자금을 만든다면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질 것은 자명한 일. 일단 공적자금이란 말을 쓰지 않고 현상황을 넘기고 보자는 ‘시간벌기’발상이 산업은행 회사채 인수란 묘수를 만든 셈이다. 이창용(李昌鏞·경제학) 서울대교수는 “금융기관과 정치권에 영향력이 큰 기업 회사채를 먼저 사준다면 3년 뒤 또 다른 공적자금이 필요한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운찬(鄭雲燦·경제학) 서울대교수도 “부실기업은 망한다는 원칙을 확립해야 할 판에 구조조정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정책을 내놓았다”며 “현 경제팀이 솔직하지 못한 정책으로 현 경제상황을 오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산업은행은 5일 만기가 돌아온 현대전자 회사채 2000억원 어치와 고려산업개발 회사채 177억원 어치 중 80%를 인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두 회사는 자신이 부담해야 할 20%조차 내놓지 않아 8일에도 차환발행을 하지 못했다.
<홍찬선·최영해기자>hcs@donga.com
▼공적자금의 범위▼
공적자금(public fu―nd)이란 부실채권정리기금(자산관리공사)과 예금보험기금(예금보험공사)이 채권을 발행해 조성한 자금을 일컫는다. 정부가 원리금 지급보증을 하며 국회동의를 얻어야 하므로 ‘공적’이란 접두어가 붙었다.
부실 금융기관에 출자하거나 부실채권을 사는 데, 또 부실 금융기관의 예금대지급을 위해 주로 사용됐다. 당장 정부 돈이 나가지는 않지만 두 기금이 이 채권을 못 갚으면 정부부담으로 돌아온다.
이와 구분되는 ‘공공자금’은 금융구조조정을 위해 지원된 자금 가운데 세계은행(IBRD) 아시아개발은행(ADB)으로부터 빌린 차관자금이나 국책은행에 대한 출자금, 자산관리공사나 예금보험공사가 차입한 자금을 포함한다. 이름만 다르지 성격이나 기능이 공적자금과 거의 똑같다. 이 때문에 편의상 공적자금 범위에 넣어 규모를 계산하는 것이 관례.
공적자금이 이미 부실해진 금융기관을 살리기 위한 돈이라면 산업은행의 회사채 인수자금은 기업 부실을 메우기 위한 돈. 정부가 사실상 지급보증을 하는 셈이며 나중에 기업이 빚을 갚지 못하면 재정으로 구멍을 메워야 하므로 ‘잠재적인 공적자금’ 성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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