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론'에서 뛰어난 솜씨로 활약하고 있는 애쉬는 무리를 지어 플레이를 '파티'에 속하지 않은 최강의 여전사. 한 때 무적이라 불리던 파티 '위저드'의 멤버였으나 뚜렷한 명분 없이 '위저드'가 해체된 이후 고독한 솔로 플레이어의 길을 걸어왔다.
우연히 '위저드'의 동료였던 스태너와 재회한 애쉬는 '아바론'의 최강 단계인 클래스A보다 높은 '클래스SA'의 정보를 듣게 된다. '위저드'의 리더였던 머피가 '클래스SA'에 도전했다가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뇌가 파괴되어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다는 소식과 함께. 그때 애쉬 앞에 나타난 의문의 남자는 그녀의 잊혀진 기억, 한계에 달한 고독과 불안을 자극한다. 마침내 게임의 최종 단계인 '클래스SA'에 도전한 애쉬를 기다리고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선두주자 오시이 마모루(押井 守) 감독이 <공각기동대>(95년) 이후 5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아바론>(Avalon)은 보는 이의 눈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디지털 영상의 향연이다.
폴란드에서 올로케이션 촬영 중, 폴란드 군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동원된 대형무장공격헬기 '하인드'(Mi-24)와 탱크(T-72)가 쏘아대는 대공자주포 '시루카'의 박진감은 분명 현실의 그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실물의 박력이 연출되는 곳은 가상 게임 세계다.
영화가 시작되면 화면 가득 펼쳐지는 세피아빛 이세계(異世界)의 독특한 비주얼은 'Mission Complete'라는 게임종료 메시지로 바뀌며 현실로 이어진다. 실사와 디지털이 완벽하게 결합된 강렬한 인트로는 영화 전반에 걸친 주제 '현실 같은 허구, 허구 같은 현실'을 암시한다.
실사로 촬영되어 컴퓨터 그래픽 수정 과정을 거친 인물들은 밀랍인형처럼 매끄럽고 무표정하게 움직인다. 게임 속에서 공격받는 순간 분쇄되고 마는 유닛의 괴성과 게임으로 뇌가 파괴된 환자들의 공허한 눈동자는 모두 거대한 환상처럼 느껴진다. 더우기 폴란드어의 기묘한 울림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더욱 모호하게 한다.
<아바론>은 감독의 전작 <공각기동대>와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실사 영화 같은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서 영혼이 존재하는 사이보그 쿠사나기를 통해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라는 인간 실존에 관한 철학적 의문을 던졌던 오시이 감독은 이제 인간을 둘러싼 외적인 요소로 그 방향을 돌렸다. 사이버 공간과 현실의 틈새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애쉬를 통해 '당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은 과연 진실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아바론>은 상징적인 암시가 반복되고, 극적 반전이나 명쾌한 결말 같은 헐리우드 영화적 요소가 부족한 탓에 오시이 감독의 세계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자칫 난해하게 비춰질 수 있는 영화다. 그것을 아름다운 디지털 영상이 다 덮어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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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동아닷컴 객원기자> lemonjam@nownu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