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협동조합이 망하기 전에는 왜 공적자금을 투입하지 않나? 꼭 망한 후 예금대지급만 해서야 되겠나?”(민주당 전갑길 의원)
“법적으로는 예금부분보장 대상이지만 신협에까지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정건용 부위원장)
정부조차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신협이 어떻게 부분보장 대상에 포함됐을까?
▼ '밑빠진 독' 공적자금 시리즈 ▼ |
- 국책은행이 나랏돈 주는 꼴 |
97년 12월 정부가 마련한 예금자 보호법안에는 신협이 대상기관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국회재경위의 심의를 거치면서 신협이 포함됐다.
신협은 ‘상호조합’으로 공적자금과는 성격이 잘 맞지 않는 데다, 전국적으로 1300여개나 돼 정상적인 감독조차 불가능한 형편이지만 ‘망하면 공적자금으로 예금을 대신 물어주자’는 수정안에 반대한 의원은 극소수였다.
▽정책에 원칙이 없다〓신협에 지금까지 들어간 공적자금은 1조6966억원. 대부분 횡령이나 불법대출 같은 사고로 문을 닫은 340개 신협의 예금 대지급으로 쓰였다. 현재로선 회수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 횡령사고가 워낙 끊이지 않아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공적자금이 더 들어갈지 모른다.
1차로 3조원, 2차로 4조900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한국, 대한투신. 투신 상품은 실적배당이어서 투자자가 원금을 날릴 수 있는데도 정부가 손실보전을 강요해 결국 공적자금을 쏟아부어야 했다.
작년 12월초, 고속도로를 점거하면서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던 농민들까지도 공적자금을 요청했다. 농가부채를 탕감해달라는 주장. 신협직원이 횡령한 돈, 부유층의 채권투자손실까지 공적자금으로 물어주는 마당에 농가에 못넣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후 관리에 구멍〓작년 12월 정부는 한빛 광주은행 등 금융지주회사에 편입되는 은행의 자본금을 0원으로 만드는 완전감자(減資)를 발표했다. 불과 한달 전인 11월14일 공시한 은행들의 3분기 보고서에서 순자산이 플러스였던 은행들이 한달새 부채가 자산을 초과하는 자본잠식 상태로 변했다.
“2차 공적자금 투입을 위해 엄격한 기준에 따라 실사를 한 결과 모두 자본잠식 상태였다”(금감위 남상덕 조정협력국장)는 것이 금감위의 설명. 그러나 이 말이 맞다면 1차 공적자금을 투입한 뒤 분기별로 경영개선계획을 점검해온 정부의 검사는 ‘대충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특히 정부내에서는 이 같은 정책 실패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 금감위는 지난해 11월말 현재 279개 금융기관을 검사해 2169명을 해임 등 징계하고 1043명을 형사고발했다. 그렇지만 부실을 키운 정부 관련 책임자는 단 한명도 포함돼 있지 않았다.
▽공적자금 회수 가능한가?〓공적자금 투입은 그동안 ‘일단 넣고 보자’는 식이었다. 재정경제부는 부실채권 매입에 들어간 31조1000억원은 담보 부동산을 팔아서, 출자로 인수한 주식 41조9000억원은 시장이 좋아지면 내다 팔아 회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자산관리공사에 남아있는 부실채권은 대부분 잘 팔리지 않는 불량 자산이며 ‘휴지조각’상태인 주식을 언제 내다팔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다.
1, 2차에 걸쳐 5조9000억원이 들어가는 대한생명. 정부는 공개입찰 매각으로 들어간 돈을 회수하겠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살 만한 능력을 가진 4대 재벌은 소유제한 4%에 묶여 인수가 어렵고 외국인의 경우도 국부유출 논란으로 여의치 않다.
서강대 최운열 교수는 “정부가 공적자금을 회수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것보다는 오히려 회수가 불가능한 이유를 솔직히 고백하고 이해를 구하는 편이 낫다”고 지적했다. “앞으로 조성되는 공적자금은 철저한 사후 관리를 통해 헛돈을 쓴다는 지적을 벗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훈기자>dreamland@donga.com
▼정부 '돌아서면 말뒤집기'▼
공적자금을 둘러싼 정부 당국자들의 잦은 ‘말 바꾸기’는 직접 손해를 본 투자자들뿐만 아니라 세금을 내는 국민이라면 모두 분통을 터뜨릴 만하다.
“현재 정부는 공적자금 추가조성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지난해 4월 12일·이용근·李容根 당시 금융감독위원장)
“현 시점에서 국회에 20조원이나 30조원의 공적자금을 추가로 동의해달라고 요구할 필요가 없다.”(지난해 5월 24일·이헌재·李憲宰 당시 재정경제부장관)
“공적자금 추가소요가 있다면 어떤 면에서 필요한지 국민에게 보고하고 국회에 정식 요청하겠다.”(같은해 8월 7일 진념·陳稔 재경부 장관)
“더 이상의 공적자금 투입은 없다.”(2001년 1월 4일 진념 재경부장관)
공적자금을 둘러싸고 이처럼 말이 바뀐 것은 정치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해 4·13 총선을 앞두고 정부당국이 장밋빛 청사진을 내놓는 바람에 결국 말을 뒤집는 실수를 저질렀다.
관료들의 말 바꾸기는 은행 감자 문제로도 비화돼 투자자들의 불만을 샀다. 감자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가 몇 달 만에 감자를 해버린 것.
정부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자 직접적인 공적자금 대신 산업은행을 통한 회사채 신속인수라는 편법 공적자금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공적자금이란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관료들의 기발한 발명품”이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최영해기자>money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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