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대근/이판사판

  • 입력 2001년 1월 14일 18시 48분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에 대해 도법(道法)스님은 그의 저서 ‘화엄의 길, 생명의 길’에서 “생명 본연의 존재 방식은 뺏고 빼앗기는 생존 경쟁이 아니라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가도록 되어 있음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이는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절하고도 시급한 처방”이라고 강조했다. 지리산 실상사 주지인 그는 98년 조계종단 폭력 사태 때 총무원장 대행을 맡아 분규를 수습한 뒤 “스님은 산중에서 빛이 난다”며 ‘권력’을 마다하고 훌쩍 실상사로 돌아갔다.

▷도법스님은 최고의 불교 경전인 화엄경(華嚴經)의 현대적 해석은 물론 몸소 이를 실천하는 ‘운동가’로도 유명하다. 올바른 수행자상(修行者像)을 확립하기 위해 90년 ‘선우도량’을 결성했고 지금은 실상사에서 ‘화엄학림’ ‘농장공동체’ 등을 운영하고 있다. 그가 전하는 화엄적 세계관은 한마디로 ‘공존 협력’이다. 그래야만 생명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파괴로 치닫고 있다. 요즘의 정치판은 이판사판,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식이다.

▷이판사판의 사전적 의미는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지경’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막간다는 부정적 의미다. 그러나 불교에서 나온 이 말은 애초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을 모두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원광대 사회교육원 조용헌(趙龍憲)교수는 ‘이판은 배후에 잠재하는 부분에 대한 일종의 신비적 파악이며 사판은 드러난 현상에 대한 합리적 분석’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답은 하나밖에 없으니 행동으로 옮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판사판이다. 그런데 요즘 정치권은 어떤가. 이모저모 뜯어보고 고쳐 생각하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의원 꿔주기, 안기부 선거자금 불법지원 사건 등을 둘러싸고 상대방 흠집내기에 여념이 없다. 도법스님이 전하는 화엄경의 현실적 의미를 다시 들어보자. ‘생명의 질서엔 나만이 사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큰 길이 있을 뿐이다.’

<송대근논설위원>dk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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