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원재/"이시점에 웬 빅딜…"

  • 입력 2001년 1월 14일 18시 48분


정부는 현대전자의 자금난을 타개하기 위해 삼성전자가 현대전자의 뒤를 봐줄 것을 최근 제의했다. 이 사실이 알려진 뒤 주요 그룹들이 보인 반응이 흥미롭다.

“우리 능력을 높이 평가해준 것은 고맙다. 하지만 현대전자 문제에 끼어드는 것은 주주들의 이해와 충돌되기 때문에 곤란하다.”(삼성 구조조정본부 관계자 A씨)

“정부의 무모한 정책으로 피해를 본 것은 우리 하나로 족하다. 이번 일이 잘못되면 그나마 잘 나가는 삼성전자까지 덩달아 부실해질 소지가 크다. 이건 정말 진심이다.”(LG그룹 임원 B씨)

재계의 전통적 라이벌이자 그룹 서열 1, 2위인 삼성과 LG가 입이라도 맞춘 듯 정부의 제의를 점잖게 거절하고 상대방을 염려하는 모습이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2년 전인 99년 이맘때 현대전자가 LG반도체를 인수했다. 현 정부가 출범과 함께 밀어붙인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의 상징적인 결과물이었다. LG측이 강하게 반발했지만 정부는 금융제재까지 들먹이며 관철시켰다. 어떻게든 ‘한 건’을 성사시키려는 의욕 탓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2년이 지난 지금 현대전자는 모 그룹의 경영권 분쟁에 반도체 가격 폭락까지 겹쳐 어려운 처지다.

반도체는 한국 수출의 15∼20%를 책임지는 대표적인 달러 박스. 결과론이지만 무리한 빅딜의 후유증으로 한국의 메이저 반도체 업체는 3개에서 1개로 줄어들지도 모를 상황이다.

이런 판국에 정부가 석유화학 등 7개 업종의 ‘2차 빅딜’ 운운하니 기업들이 ‘빅딜 노이로제’ 증세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한 기업인은 “요즘 기업하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극단적으로 말해 경제관료들이 불필요하게 간섭하지만 않으면 해볼 만하다”면서 “누가 입안한 정책이 나중에 우리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검증하는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다시 빅딜정책 카드를 내미는 당국자는 ‘정책실명제’에 의해 이름을 당당하게 내걸 수 있는지 자문해야 할 것이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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