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문화의 키워드로▼
이처럼 정상적인 사회생활과 무관한 용어가 2000년 한국 청소년 문화의 키워드로 자리잡았다. 엽기는 2000년 한 해 동안 네티즌들의 인기 검색어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한 방송국 조사에서는 2000년 최고의 유행어로 선정됐다. 엽기게임 엽기개그 엽기광고 엽기파티 엽기에로물 등 세상만사에 엽기를 접두어로 무턱대고 갖다 붙이는 엽기 신드롬이 한국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엽기 신드롬을 부채질한 것은 ‘엽기토끼’와 ‘노란국물’이다. 네티즌들은 귀여운 토끼가 머리로 맥주병을 깨뜨리며 덩치 큰 곰을 협박하는 모습에 열광했으며, 20대 여인이 억지로 토해놓은 노란 국물을 주물럭거리는 역겨운 장면을 즐겨 보았다.
엽기적인 주제는 서구에서 표본예술(specimen art)의 형태로 표현된 지 오래이다. 과학이론을 차용 또는 비판하는 표본예술은 박물관에서 나비를 표본판에 핀으로 고정하고 상세한 설명이 적힌 꼬리표를 달아 전시해 놓는 것처럼 사람 자체를 표본으로 사용해 실물 조각 사진 또는 비디오를 전시한다.
표본예술가들은 체액이나 유전자(DNA) 또는 인체 같은 것을 표본으로 사용한 예술작품을 만들어 삶 섹스 죽음의 이미지를 창조한다. 체액의 경우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기 십상인 혈액 정액 오줌 모유 생리혈 따위를 마치 페인트나 진흙처럼 예술작품의 재료로 사용한다. 체액에는 종족 성별 외모 등 인간을 구분하는 요소가 없기 때문에 체액을 이용하는 예술행위는 기존의 분류법을 파괴한다는 게 표본 예술가들의 주장이다.
표본예술의 핵심인물은 독일의 군터 폰 하겐스이다. 해부학 교수이자 조각가인 그는 사람의 시체를 특유의 방법으로 처리한 작품을 제작한다. 해부용 시체에서 지방이나 외부 표피를 벗겨내고 얇게 저민 근육과 뼈를 배열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인간 사시미’라고 불린다. 사시미는 생선회의 일본말.
1998년 독일 만하임의 전시회에서 200점의 사람 시체가 전시됐는데 수십만명의 관람객이 줄을 섰다. 1999년 빈 전시회에는 얇게 저며놓은 장기, 탯줄에 매달린 아기, 병 속을 떠다니는 생식기, 출산 모습을 재현하는 여체 등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작품들이 선보였다. 2000명 이상이 사후에 폰 하겐스의 작품활동을 위해 자신들의 신체를 기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명비평가인 존 나이스비트는 ‘하이테크 하이터지’(1999년)에서 인류사회가 유전공학으로 진보하는 시점에서 표본예술은 “인간성을 분류 측량 가공이 가능한 화학물질의 덩어리로 격하하는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가장 순수한 본질상의 거부반응”이라고 평가했다.
표본예술의 가장 강력한 주체는 죽음이다. 유전공학이 발달하더라도 결국 인간은 모두 죽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표본예술가들은 시체 안치소로 달려가서 머리가 잘려나간 주검의 사진을 찍거나 자살 명소인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에 비디오 카메라를 설치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의 추락하는 모습을 화면에 담는다.
▼일탈행위로 매도만 해선 안돼▼
표본예술가들은 시체와 죽음의 이미지를 등골이 오싹하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함으로써 생명공학의 위력과 한계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엽기 열풍을 표본예술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은 아무래도 성급한 논리의 비약일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광기와 폭력성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맹목적인 일탈행위로 매도할 일만은 아닌 듯 싶다. 입시지옥에 시달리고 취업의 길이 막힌 답답한 현실에서 한국 청소년들에게 엽기는 최후의 비상구가 아니었을까.
이인식(과학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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