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 찰싹 달라붙어 왕자라도 된 듯 꼼짝않는 남편과는 달리 명절이나 제삿날이면 전 늘 기름투성이가 됩니다. 요리솜씨가 별볼일 없는 며느리가 할만한 일이라는 게 전 부치기, 부침개 지지기 정도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거죠.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고 맛을 내는데는 별 소질 없는 저도 모양을 내는데는 좀 소질이 있는 편이라 제가 만든 녹두 부침개는 그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만큼 동그랗고 통통하고 먹음직스럽답니다. 저희 시어머니도 "쟤가 부침개 하나는 동그랗게 잘 만든다..."하십니다. 그러다보니...결국 하루 온종일 프라이팬을 끼고앉아 이따만한 소쿠리가 가득찰 때까지 부치고 뒤집고 지지고를 한답니다.
제 어설픈 합리주의에 따르면 식구도 얼마 없으니 제사상에 올라갈 것만 만들어서 가볍게 먹어버리면 일하기도 수월하고 남은 음식 처리할 걱정도 없을텐데 어디 "한국의 어머니"들이 그런가요? 일단 넉넉하게 만들어서 남으면 자식들 싸주고 그래도 남으면 냉동실에 넣었다가 두고두고 먹으라 하시죠.
하지만 녹두부침개 하나 만들기가 그렇게 만만한가요? 만들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녹두부침개 하나를 지져내기 위해선 고도의 집중력과 인내심이 요구되지요. 녹두를 갈면 이것들이 서로 엉겨주면 좋을텐데 절대 엉기지 않고 퍼지거든요. 그래서 뒤집을 때 조금만 방심하면 걸레마냥 흐트러지거나 무참하게 찢어져버리죠. "방금 뭐가 뒤집혔냐?"싶게 날렵하게 뒤집어줘야 동그란 모양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어요.
또 녹두는 익는 속도가 좀 느려요. 안에 돼지고기라도 넣으면 더 오래 익혀야 하죠. 그 지루함이란...근데 정말 신기한 건 "한참 더 익혀야겠네...잠깐 TV라도 볼까?..."하면 영락없이 새까맣게 타버린단 거죠. 도닦는 마음으로 천천히 익히고 순식간에 뒤집어줘야 하나의 먹음직한 부침개가 탄생하니, 정말 세상에 쉬운 일은 없는 모양입니다.
아, 정말 중요한 사실을 빠뜨렸네요. 그렇다면 제가 녹두부침개를 좋아하느냐? 아니랍니다. 제가 만들고도 젓가락 한번 안 갖다 댑니다. 녹두부침개는 무슨 맛으로 먹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어째 밍밍하고 심심하고... 어쨌든 좋아하지도 않는 녹두부침개를 만들기 위해 하루종일 쭈그리고 앉아 기름냄새에 쩔어지내는 제 정성을 조상님께선 알고나 계시는지 모르겠네요. 꼭 아셔야할텐데...
***녹두 부침개 만드는 법***
재 료 : 녹두 3cup, 김치 100g, 돼지고기 150g, 실고추 약간, 찹쌀 2cup, 파 30g,
간장 2큰술, 식초 1큰술, 다진 파 1큰술
만들기 : 1.녹두를 깨끗이 씻어 물에 불린 후(3시간이상)껍질이 벗어지기 시작하면 양손으로 여러 번 문질러 물을 갈아주면서 껍질을 하얗게 벗겨 물 1컵을 넣고 믹서에
간다.
2. 돼지고기는 곱게 채썰어 분량의 양념에 버무려 놓는다.
3. 배추김치는 채썰어 참기름에 버무려 놓는다.
4. 파도 채썰어 놓는다.
5. 간 녹두에 돼지고기, 김치, 파를 섞어준다.
6.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갈아놓은 녹두를 적당히 떠넣어 둥글게 편다
(편하게 하겠다고 너무 크게 만들면 뒤집을 때 다 찢어집니다...)
7. 노릇노릇하게 익혀 채반에 펴놓는다
8. 초간장은 간장, 설탕, 식초, 다진파를 섞어 만들면 된다
ps. 퍼뜩 떠오른 생각인데 조상님들은 김치부침개나 파전같은 건 싫어하실까요? 전 죽기 전에 꼭 "얘들아, 내 제사상에는 내가 좋아하는 딸기랑 귤이랑 약식같은 걸 올려다오..."하고 말할래요. 제사상도 형식파괴! 조상님의 입맛에 맞는 맞춤제사상이 나오는 시대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조수영 <동아닷컴 객원기자> sudatv@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