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김치는 잘 익었습니까. 제 아내는 추위 때문에 아파트 베란다에 내놓은 김장 김치가 잘 익지 않을 것 같다고 걱정이더군요.
오늘은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던 한 병사의 `김치편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67년 1월19일자 신아일보의 <월남통신>이란 섹션에 실린 내용입니다. `청룡 1대대 2중대 소위 최명식'이 쓴 편지로, 제목은 `월남에 온 김치'로군요.
<김치란 우리민족과 더불어 살아온 음식이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김치가 있어야 하고 김치를 먹어야만 식사를 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김치와 가까이 지낼 때는 그 김치의 맛과 귀중성을 미처 몰랐었다. 현재 월남에 있는 많은 한국군은 미군부대에서 급식되는 C레이션을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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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식 소위는 그 C레이션 안에 있는 햄, 잼 등 느끼한 음식을 잔뜩 소개한 뒤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처음엔 호기심과 별미로 몇끼를 즐겨먹는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면 이것을 먹기란 겨울에 홑바지 입고 지나기처럼 힘들고 괴롭다. 아예 먹을 생각도 없고 보기도 싫어진다.
그러나 계속되는 작전으로 안먹을 수도 없는 형편에 놓여 먹고지냈다. 12월에 접어들어 국산 C레이션이 지급된다는 소리가 들리면서 우리들의 사기는 충천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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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련했겠습니까.
오죽하면 C레이션 먹기가 `겨울에 홑바지 입고 지나기처럼 힘들고 괴롭다'고 빗댈을까요. 저도 김치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하는 토종 식성이라 외국에 나가게 되면 입고생이 여간 아닙니다. 그래서 최명식 소위의 괴로움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희소식이 들려옵니다. 국산 C레이션이 지급된다는 낭보지요.
< 드디어 국산 C레이션이 도착했다. 어느 해질 무렵 쌀밥을 해서 고기 몇점과 된장으로 식사가 끝날 때 쯤이었다.
우린 급히 식사를 중지하고 전원이 국산 C레이션을 타올 때까지 숫가락을 든채 그 자극적 시원한 김치맛을 생각하며....(중략)
조그마한 국방색 통에 한글로 김치라고 쓴 글자, 우린 속히 뚜껑을 열었다. 빨갛고 노란 색깔이 섞어진 배추잎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우선 식탁에 앉은 대원들과 협의하에 오늘은 한통만 먹기로 했다. 모두 만면에 미소를 띠고 신기한 듯 빈 통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추하거나 어색하질 않다. 그저 단순한 김치맛 뿐만 아니다.
김치에 포장된 따스한 어머니의 정을 찾고싶고 또 먼 이곳까지 보내줄 수 있는 조국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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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편지지요? `어머니의 정'을 그리는 병사의 글은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그런데요, 이 섹션에는, 그러니까 이 병사의 편지 옆에는 또 `VC 49명 사살, 청룡 투망 작전 첫날'이란 제목의 기사도 실려있군요. VC는 아마 베트콩(Viet Cong:Viet Nam Cong San)이겠지요?
< 청룡부대는 성탄절과 신정 휴전기간을 이용, 증강정비된 베트콩을 색출하는 한편 금년도 전술 책임지역 확장을 위한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투망작전이란 여단규모의 소탕작전이 지난 1월5일 각 대대별로 책임구역을 중심으로 일제히 개시, 48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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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따뜻해졌던 가슴이 식는 느낌입니다.
베트남전의 비극은 수십년 전의 빛바랜 신문에서도 여전히 생생하군요.
67년이면, 제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1년 전입니다. 그때 저를 비롯한 충남 예산 사직동과 대회리의 촌 어린이들은 툭하면 전쟁놀이를 했습니다. 좀 큰애들은 청룡부대, 백마부대 소속 파월장병이 됐고, 저같은 어린 꼬마들은 형들의 강압에 못이겨 베트콩이 됐지요.
무기는 나무로 만든 총과 칼이었습니다.
오, 지금도 제 왼손 검지손가락에는 그때의 상처가 남아있습니다. 나무칼을 만든다고 잘 들지도 않는 부엌칼을 휘두르다 손가락을 내리쳤지요. 무슨 야쿠자 단지의식(斷指儀式) 하듯 온힘을 다해 내리쳤으니, 그때 크게 놀라셨을 어머니, 죄송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68년. 앞집 살던 백낙이네 큰형은 총 들고 월남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나보다 한살 더 많았던 백낙이는 이따금 큰형이 보내온 C레이션 속의 들적지근한 먹거리들을 들고나와 제또래 꼬마들을 환장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백낙이의 큰형은 월남에서 이상한 물건을 보내왔습니다. 백낙이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것이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상자에도 영어, 설명서에도 꼬부랑 글씨만 잔뜩 쓰여있으니 알 도리가 없었겠지요.
백낙이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고민하다 못해 결국 그 물건을 우리 아버지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아버지는 시골 농업고등학교 영어선생이셨고, 그 시골 마을 최고의 지식인이었지요 하하.
마을 어른 서너명, 그리고 백낙이네 5남2녀들도 동석하고 있었지요. 저도 물론 그 요상한 물건이 궁금해 다른데 놀러갈 염도 내지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아버지는 안경을 코에 걸치시고 설명서를 읽기 시작하셨습니다. 좌중의 남녀노소들은 무슨 말이 나올까, 숨소리마저 죽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가 입을 여셨습니다.
"이거 소리 녹음하는 녹음기라는 겁니다."
"예?"
"그러니까, 뭐냐면, 아~하고 여기다 소리를 지르면 조금 있다 이 기계가 다시 그 소리를 내지르는 겁니다."
"예? 시방 말씀하시는게 뭐래유, 그러니께...."
뭐, 말하자면 우리는 부시맨이었어요.
우리 아버지는 백낙이 아버지에게 "이런 거 집에서 쓸 일은 없을 거고.... 아마 시내 큰 전파상에 나가 팔면 돈이 좀 될 테니 파슈"라고 권하셨지요.
그 녹음기를 실험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제 아버지는 워낙 전구 하나 못깔아 끼우시던 기계치셨기 때문에 몇번 만지작거리다 포기하셨고, 호기심이 강했던 동네 청년 하나가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만 혹여 고장날까 겁났던 백낙이 아버지의 눈치 때문에 포기해야 했습니다.
백낙이 아버지가 그 녹음기를 어떻게 처분했는지는 기억에 없군요.
그 녹음기,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하늘은 멀다 해도, 자유통일 위해서....'
꽤 오랫동안 외고 있던 군가인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그때 얕으막한 마을 뒷동산 꼭대기에는 스피커를 서너개 달아둔 탑같은 것이 있었고, 그 스피커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툭하면 `맹호부대 용사들아...'같은 군가, 그리고 가끔은 `해당화 피고지는 섬마을에...'같은 영화주제가가 터져나오곤 했습니다.
저는 `맹호부대 용사들아....'만 나오면 가슴이 뜨거워져 백낙이 형을 생각했고, 백낙이를 부러워 했지요. 그리고 얼마 뒤 우리집은 서울로 이사왔습니다.
그리고 이영희 교수의 책을 읽은 것은 세월이 함참 흘러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였지요.
이제 신문에는 `고엽제'니 `베트남 양민학살'이니 하는 헤드라인들이 심심찮게 눈에 띕니다.
그러고보니, 장손이었던 백낙이네 큰형은 월남에서 무사히 돌아왔을까. 장가 가서 애 잘낳고, 올겨울에도 그애들이랑 맛있는 김치를 먹고 있을까.
늘보<문화평론가>letitb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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