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력 높여 개방압력 이겨야▼
세계화의 물결이 예상보다 빠르게 일고 있고, 세계시장은 단일시장으로 급속히 통합되고 있다. 무한경쟁이 상승기류를 타고 있는 가운데 자유무역을 앞세운 미국의 새 행정부가 들어섰고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는 등 대외여건이 태풍의 눈처럼 돌변하고 있다.
농산물시장 보호에 대한 국내수출업계의 시각도 예전과는 달리 결코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농산물시장 보호에 대한 국내 수출업계의 시각은 냉소적일 뿐만 아니라 소탐대실이란 인식마저 확산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농산물시장 개방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소란을 떨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 초, 그러니까 20년 전이다. 정부는 물론 정치권과 학계 그리고 농업단체와 농민들도 나름대로 개방에 대비한다고 노력해 온 것은 사실이다. 1992∼98년 정부는 42조원을 농업구조 개선을 위해 쏟아부었다. 86년부터 7년간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으로 시달렸고, 93년에는 쌀시장 개방을 10년간 연장하느라 나라가 들썩거릴 정도로 몸부림쳤다.
그런 노력으로 농업이 아직 망하지 않았고 굶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개방화시대에 떳떳하게 나설 수 있는 농산물이 별로 없는 것도 현실이다. 농민들은 희망과 의욕마저 잃고 뉴라운드협상을 의심과 두려움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 농업에 희망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요, 비교우위 품목이 적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20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많은 자금을 투입하고도 대외개방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던가.
반성의 차원에서 우리의 자화상을 그려보면 필자를 포함, 남에게 돌을 던질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행정부는 현장중심의 철저한 실사구시적 행정을 펴지 못하고 탁상행정과 구호 전시행정 내지는 땜질식 처방에 치우친 감이 짙다. 정치권은 세계의 변화를 바로 읽고 지도자적 입장에서 농민을 제대로 인도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채탕감 같은 선심공약의 남발과 백화점식 인기정책만 독려한 측면이 많았다.
농산물의 생산과 출하를 조절하고 선별포장과 계통출하를 통해 제값을 받도록 앞장서야 할 농협은 돈장사에 치우쳐 제 역할을 못했고, 학계는 산학협동을 통한 기술혁신에 소홀했으며, 농민들은 자주 자립정신을 결여한 채 의타심에 젖은 감이 있고, 언론도 표피적이고 부정적인 여론에 편승한 면이 적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적극적인 대비책으로는 우선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품목과 그렇지 못한 품목을 나눠 한국농업을 전면 재개편하고, 유리한 품목 중심의 구조조정을 펴야 할 것이다. 동시에 농장다운 농장을 만들고 기술농업 고품질농업 수출농업을 지향하며 산학협동에 의한 기술혁신을 배가해야 한다. 또 품목별 전문 협동출하조직을 육성하고, 대규모 허브(Hub)시장을 만들어 농산물 유통비용을 절반으로 줄이는 등 경쟁력을 최대한 높여야 한다.
▼주요 수입국간 공조 필요▼
소극적인 대비책으로서는 주요 수입국인 일본 유럽연합(EU) 스위스 노르웨이 등과 정기적으로 만나 공조방안을 협의하며, 수출국들에게는 농업의 비교역적 다원적 기능을 들어 공세적인 설득작업을 벌여야 한다. 협상 전문단을 구성하고 농민단체 소비자단체 학계 언론계를 참여시켜 의견을 수렴하고 협상동향을 투명하게 알려야 한다. 고위급 외교활동 강화와 국회 및 시민운동단체(NGO)와의 협조도 강화해 나가는 등 최선을 다함으로써 시간을 벌고 협상의 여지를 넓히면서 개방의 속도를 늦추고 안전망을 확충해야 할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주요 품목별 가격안정대책특별위원회를 만들고 우선 농산물 제값받기부터 실현해 농민들에게 신뢰와 희망부터 불어넣어야 한다. 중기적으로는 농민들의 자주 자립정신을 함양시키고 품목별 주산지별 지도자를 육성해 판로개척과 유통개혁에 앞장서게 해야 한다. 이런 기반 위에 장기적으로 획기적인 농업 구조조정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높이고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데까지 전략이 수립돼야 할 것이다.
허신행(서울시 농수산물공사 사장·전 농림수산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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