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밤 9시40분∼10시 사이 택시를 타본 사람들은 안다. 라디오 드라마 <배철수의 고우영 삼국지>(MBC FM 95.9㎒)가 얼마만큼 인기 있는지를.
지난해 10월23일 첫 방송을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MBC 라디오가 인기 만화작품을 라디오 드라마로 만들어온 <만화열전>의 7번째 작품. 그러나 종전 작품은 방영기간이 기껏해야 달포였던 반면 이 작품은 넉달째 순항 중이다.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이 작품 때문에 "사고가 날뻔 했다"는 항의성 감탄과 칭찬이 1200여건 넘게 올라왔다. 오죽하면 지난 10년간 MBC 라디오 DJ를 해온 배철수가 택시운전사로부터 "요즘 라디오 잘 듣고 있다"는 인사를 듣는 프로그램이 '음악캠프'가 아닌'고우영 삼국지’일까.
그 인기의 비결은 1700여년전 이야기를 오늘날 현실에 접목시킨 절묘한 패러디에 있다. 이번 주 방송되고 있는 ‘영웅 마초’편을 보자. 아버지 마등이 밥상머리에서 마초 3형제에게 훈계를 늘어놓다 임춘애와 현정화를 착각하자 마초가 이를 지적한다. 마등은 숨을 들이키고 “상물려라”고 내뱉은 뒤 이를 말리는 다른 아들들에게 “다들 나가”라고 외친다. 영화 ‘넘버 3’의 패러디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오나라 군신들이 화전양론을 두고 다툴 때는 난데없이 ‘유시민의 100분토론’이 등장한다. 북서풍이 동남풍으로 바뀌는 바람에 함대를 몽땅 잃은 조조가 전화를 걸어 분풀이하는 상대로는 기상통보로 유명했던 김동완씨가 출연한다. 유비의 못난이 아들 유선은 영어 이니셜을 따서 YS로 바뀌고, 서서가 유비에게 면접을 볼 때는 한국 축구의 문제점이 물흐르듯 흘러나온다.
원작에도 없는 이런 패러디들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의 콩트작가로 6년간 활약한 작가 김도상(30)의 역량이다. 그는 “삼국지는 소설로 100번, 만화로도 100번을 읽었기 때문에 따로 원본을 읽지 않아도 글이 술술 나온다”며 “워낙 유명한 작품이다 보니 패러디의 소재가 무궁무진하다”고 말한다.
여기에 국내 유명인사들 흉내란 흉내는 다 내는 출연진의 화려한 개인기와 애드립까지 더해져서 포복절도할 웃음을 끌어낸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백명의 목소리를 연기하는 것은 11명. 연출가 김애나 PD는 “일당 백의 능력을 지닌 이들만 가려 뽑은 정예부대”라며 자부심이 대단하다.
개그맨보다 탤런트로 더 유명해진 정성화는 장비 목소리는 물론 각종 효과음을 도맡는다. 초선은 물론 삼국지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의 목소리를 혼자 도맡는 홍일점은 ‘명랑자매’로 유명한 개그우먼 박희진. 특히 공명역의 성우 이인성은 팀내 막내인 개그맨 문천식과 20세이상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10대팬들로부터 ‘애드립의 황제’라는 칭호를 얻을만큼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한 목소리만 고집하는 것은 해설을 맡은 배철수 뿐. 원래 장비역을 염두에 두고 캐스팅됐다는 그는 “천하를 제패하려면 공명을 얻으라 했듯이 청취율을 높이려면 나를 모셔가야할 것”이라며 특유의 천연덕스런 목소리로 너스레를 떨었다.
<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