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에 오면 빼놓을 수 없는 즐거운 산책 코스 하나가 있다. 다산초당(茶山艸堂)에서 만덕산을 넘어가는 백련사(白蓮寺)까지의 산길이다. 다산이 8년 동안 강진성 밖 유배지에서 고생하다가 처사 윤단(尹 )의 산정(山亭)에 옮겨 살면서 스스로 차밭을 일구고 호를 다산(茶山)이라 부른 다음에 하루도 빠짐없이 거닐었던 오솔길이다. 그로 하여 예암선사와도 가까웠고 백련사의 사적기도 다산이 쓴 것이다.
이 오솔길을 걸어서 20분이면 백련사에 닿을 수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때마다 운치가 다르다. 눈 속에 발목이 빠지거나, 생꽃으로 지는 동백꽃을 밟거나, 낙엽 속에 발목이 묻히는 일은 즐겁다. 백련사에 닿으면 차를 파는 선원에 앉아 세작 찻잔을 기울이며 땀을 씻을 일이다.
‘아침 노을 일고 뜬 구름 희게 날고 맑은 날,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나 밝은 달이 구강(九江)에 걸려 있을 때, 차 한잔의 맛이 온 기운을 쇄락하게 하고, 등잔 밑에서 기울이는 맛이 곧 자순(紫荀)의 향입니다…. 부디 차를 보내주십시오.’
차를 보내달라는 정성어린 마음이 나타나 있는 다산의 편지글이다. 1805년 겨울 예암선사께 보낸 것이다.
이런 멋을 두고도 허겁지겁 살다보니 난민의식의 때를 못 벗은 여행객에겐 이 글이 다소 부담스러울지 모르지만, 어쨌든 여행이란 느긋하고 볼거리, 먹거리가 갖추어져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볼거리와 먹거리가 함께 갖추어진 곳, 강진. 20여년 전만 해도 산호장이라는 간판을 달고 옛멋을 풍겼던 그 집은 특색 있는 음식들을 코스별로 내오곤 했다. 시쳇말로 지체 높은 양반이 떴다하면 ‘풀 코스’도 사양 못했던 시대였다. 그때 생합죽 맛을 안 사람은 지금도 해태나 명동에 가서 가끔 생합(백합)죽을 찾는다.
생합은 칠량 구로의 뻘에서 나온 것이라야 진짜 토산품이었다. 장어구이는 반드시 강진만을 흘러드는 목리천의 장어라야 토산품이었다. 밤젓은 밤톨만을 따 담는 것이라야 토산품이었다. 그 대신 지금의 밤젓은 전어창젓에 불과하다. 굴비나 굴비장아찌는 특별한 주문에 의할 뿐, 그 대신 농어구이나 민어구이가 오른다. 고동무침도 ‘자산어보’에 나오는 갯고동이 아니라 양식 우렁회로 대신하고 있다. 남도의 한정식에서는 젓갈이 꽃인데 적어도 세 종류 이상은 상에 올라야 하고 토하젓은 필수 종목이다.
산호장 시절에는 이따금 뻘밭에서 훑어낸 매생이데침도 별미였다. 달보드레한 감탕맛이 백합 못지않았다. 이로 보면 남도에서 ‘야, 그 뻘밭이 참 달다’는 말은 예사말로 쓰인다.
지금은 이 산호장 시절을 지나 해태, 명동을 비켜서 종가집(宗家)이 문을 열었다. 종가집(이상귀·061-433-1100)은 광주시 화니백화점 이화성씨의 집채를 그대로 옮겨온 것. 고래등 같은 와가(瓦家)에 잔디밭 마당만도 100평이다. 이따금 결혼식장으로도 오픈된다. 전라남도가 지정한 명가(名家) 아홉 군데 중 청자골 종가집도 그 중 하나다. 특히 안주인인 김은주씨의 ‘대합찜’은 전통식이 아닌 개발식품부로, 남도음식 큰잔치에서도 그 색과 맛으로 ‘뜨는 음식’에 든다.
‘강진원님 대합자랑, 해남원님 참게 토하젓 자랑’이란 말도 있지만, 한정식 또한 해남의 천일관과도 차이가 있다. 한정식은 4계절 따라 다르고, 지역성이 다르고, 무엇보다 안주인의 품위에서 상차림이 달라지는 게 특징이다. 동시에 하룻밤 새 먹는 음식이다. 더운 음식은 더운 음식, 즉 구이는 구이대로 탕은 탕대로 적어도 열두 순배는 돌아야 소리판이 나오고 시, 서화가 나온다. 종가집에서도 처음은 식대로 했으나 손님들이 싫어해서 모듬상으로 한다고 고백한다. 적어도 1만5000불 소득시대에나 맞는 음식이고 한량끼 문화가 퍼져야 맞는 상이다.
종가집은 매 란 국 죽의 4군자 안방을 갖추고 있어 시설로는 남도에서도 최고다. 개불 오도리 표고구이 도미회 전어구이 민어찜 재첩국 산낙지 메로볼따구(태평양 심해어) 목포3합 어란 은행구이 붕장어구이 매생이(겨울) 쇠고기구이 등 다양하게 차림표도 갖추었다. 귀한 순채나물도 있다. 4인 기준 8만원.
옛가락으로 정종대포나 몇순배 들고 취기 오르면 구강포에 뜬 달을 보라. 이 집 마당에서 거닐어봄도 잠시의 쉬어가는 멋이라면 멋일 듯하다.
송수권(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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