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콧수염

  • 입력 2001년 2월 2일 18시 39분


◇콧수염/엠마뉘엘 카레르 지음/전미연 옮김/224쪽, 7500원/열린책들

‘내가 콧수염을 길렀다는 것을 증명해줄 사람은 누구인가?’

이것이 건축가인 인텔리 주인공이 겪는 존재론적 고민이라면 너무 유치한가. 부인의 사랑을 하루아침에 의심하게 만들 만한 자기 정체의 징표가 고작 콧수염이라니. 사소한 소재를 통해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악몽으로 둔갑시킨 데에 이 소설이 갖는 서늘한 매력이 있다.

주인공인 ‘그’는 어느날 아침 10년 넘게 기른 콧수염을 쓱쓱 깎는다. 놀랄 것으로 기대했던 아내는 매끈해진 그의 얼굴을 보고도 무심하다. 무관심이 장난인줄 알았지만, 아내는 처음부터 콧수염은 없었다고 항변한다.

히치콕의 공포영화처럼, 경쾌하게 시작된 소설은 서서히 악몽의 서스펜스로 빠져든다. 처음에는 자신의 정신상태를 의심하던 그는 점점 아내가 미쳤을 것이라 의심한다. 옛날에 찍은 사진 속에 보이는 콧수염조차 아내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혹시 아내가 친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자신을 없애려고 술수를 부리는 것은 아닐까.

망상의 나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피해망상으로 치닫는다. 서서히 허구는 현실을 능가하고, 망상이 이성을 제압하고, 논리가 부조리 앞에서 맥을 못춘다.

마지막 몇 페이지의 선혈이 흥건한 반전은 독자를 위해 아껴야 하겠다. 다만 그 서늘한 공포만큼은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영화 ‘식스 센스’에서 주인공이 마지막에 가서야 자신이 죽어 혼령이 됐음을 깨닫는 장면에 견줄 만한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정말 ‘그’에게 정말 콧수염은 있었던 것일까? 책의 앞뒤를 뒤적여봐도 그 해답은 모호하다. 어쩌면 그것은 중요한 질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콧수염이 묘파하는 것은 사소한 것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혹은 사소한 것으로도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현대인의 서글픈 초상이다.

1986년 발표한 엠마뉘엘 카레르는 이 작품으로 프랑스 권위지인 르몽드로부터 일약 ‘문학의 천재’란 칭호를 얻었다. 평범한 주인공을 비극에 빠뜨려 처참하게 파멸시키는 독특한 스타일리스트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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