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성과 문명'

  • 입력 2001년 2월 2일 18시 44분


◇성과 문명

왕일가 지음 노승현 옮김 가람기획 290쪽 9000원

침대에 사람 하나가 누워 있으면 거기에는 말 한 마리와 악어 한 마리가 같이 누워 있다는 비유가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새로운 포유류’(인간), ‘오래된 포유류’(말), 보다 하등한 ‘파충류’(악어)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밥 먹고 교미하는 일로서만 존재하는 파충류에게서도 인간이 보이고, 파충류 보다는 더 많은 감정을 갖고 있어서 ‘애정’과 ‘가족의 느낌’을 가능하게 만드는 오래된 포유류는 물론 인간의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새로운 포유류이며 자연계의 독립변수인 까닭은 무엇인가?

사실은 초등학생들도 이 답을 알고 있다. 문명을 구축했다는 사실이다. 그 문명구축의 원동력으로 프로이트라는 할아버지가 ‘발산할 길 없는 성욕의 승화’라고 설명한 것은 고등학생 때쯤 알게 된다.

그 다음 단계의 인지발달로 알게 되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 무엇일까? 신과 야수의 양면성, 아니면 욕망의 그늘과 문명의 잔혹성? ‘자연의 목표’와는 다른 ‘인류의 목표’를 가진 데서 따르는 쾌락과 고통? 아, 어렵다. 일단 우리 현실로 와 보자.

한 10여년째 우리 사회를 풍미하고 있는 각종 성담론이며 욕망이론들은 문명사적이고 존재론적인 인간이해라는 고매한 동기에서가 아니라 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집단적 구호 이후의 개인이 처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억압에서 해방으로, 집단에서 개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의 반영이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존재의 고요한 평화를 깨고 혼돈의 개척지로 뛰어드는 모험이기도 하다. 어쨌든 포유류로서건 한국인이라는 지역성으로서건 인간 이해의 핵심에는 성이 있다.

‘새로운 포유류’ 운운의 해석이 담긴 문명론적인 성담론 번역서가 나왔다. 대만출신으로 의대를 나와 의사노릇 대신 21권의 성풍속서를 집필한 전업작가라는 저자의 이력에서 짐작하듯 박학과 다재가 문장 도처에서 번뜩인다. 하지만 한국적 취향인 ‘치열한 문제의식’을 과시하는 편은 아닌 듯하다. 무척 재미있고 현란해 보이지만 기본관점은 비교적 신중한 편이다.

‘인성본색(人性本色)’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18편의 칼럼 모음집인 이 책은 인간 성심리를 종횡무진 기술, 과연 인성의 본색이 이토록 다채롭구나 하는 경탄이 절로 나온다.

‘모든 동물은 교미 후에 슬프다’라는 펄링게티의 인용으로 출발하는 전반부는 욕망과 욕정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할애되고, 이어서 남녀간의 피학증이나 서구 성혁명의 양면성, 예술과 색정의 관계, 성애의 각종 이설과 신화, 상징체계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아니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까마는 ‘변태’ 항목에서 특별한 공부와 시사를 얻었다는 개인 독후감도 적어둔다.

‘알면 사랑한다’는 동물생태학자 최재천의 말에 동의한다. 이에 덧붙이자면, ‘모르면 이지러진다’. 우리 사회의 성적 이지러짐의 배후에는 중세적 미몽과 무지가 자리잡고 있다. 더 많은 성에 앞서 더 깊은 성 ‘담론’이 필요하다는걸 중국인 저자가 일깨워 준다.

김 갑 수 (시인·SBS 라디오 ‘책하고 놀자’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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