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간에는 북한을 다루는 방식과 속도가 문제되고 있다. 주미대사는 조지 W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을 클린턴 정부 정책과의 뉘앙스 차이라고 설명한다. 정상회담에서 미국측에 조금만 설명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소리로 들린다.
외교에서 상대방의 의도를 오판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스탈린과 김일성은 미국이 외교 항의 정도밖에 하지 않을 것으로 오판하고 남침했다. 부시 정부가 밝힌 대외정책의 총론적 기조와 문면을 보면 미국의 대북관계가 예사롭지 않을 것임은 물론이고 남북관계에도 제동이 걸릴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부시의 외교안보팀은 현실주의정책(Realpolitik)을 표방하고 있다. 실리라고 생각되면 힘을 사용해서라도 목표를 관철하려는 정책이다. 특히 상호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한반도정책은 ‘대단히 대단히 조심스럽게’ 그리고 ‘대단히 대단히 현실주의적으로’ 펴나갈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대단히 이례적인 비외교 어법이다. 북한이 특히 군사면에서 종래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뭔가를 보여주지 않는 한 식량원조를 제외한 어떤 것도 북한에 주지 않을 것이며 관계정상화도 서두르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한국은 미국을 다루는 데 있어서 그 외교적 제약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정학적 제약에 더해서 북한이 만든 핵과 미사일 문제가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의 세계정책상 주요 과제인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는 한미간 토의사항이긴 하나 협상대상은 아니다. 미국은 자신의 정보와 판단에 따라 독자적으로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분야에서 클린턴의 대북협상 틀을 ‘기꺼이 답습할 수도 있을 것(may be willing)’이라는 부시의 말은 답습하지 못할 것이라는 쪽으로 해석할 법하다. 외교에서 ‘maybe’는 ‘no’에 가깝다. 북한이 진짜 달라지지 않는 한 한미관계를 초월하는 문제가 남북관계를 압박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외무장관회담은 부시가 던진 공을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넘기는 첫번째 매치에 해당한다. 미국은 우방들에게 진실한 외교정책을 펴나가는 대신 우방들도 미국에 대해 진실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한미 공조관계를 부시 기준으로 맞춰달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권력의 고집이나 막연한 희망 때문에 외교는 왕왕 그릇된 정책을 유발한다. 한미관계는 고장나 있는 것이 분명하다. 결국 양국간 동맹정신에 회부해 수리돼야 할 것 같다.
이장춘(전 외교통상부 대사·경희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