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의 신문들은 살신성인,산화 등의 표현을 써가며 그의 의로운 행동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신문을 보니 그의 집안은 일본과 질긴 악연이 있더군요. 할아버지가 징용으로 끌려간 뒤로 맺게된 악연이랍니다.
수십년 전 신문에서 일본 농민들을 위해 곰사냥에 나선 한 청년의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기사를 읽다보니 이수현씨의 얼굴이 겹쳐 떠오르더군요. 그 청년과 청년의 집안 또한 일본과 악연을 맺고 있었지만,청년은 일본사회에서 의인으로 칭송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국일보 66년 2월20일자 신문기사입니다. 제목은 <한마을 살린 명포수 김재명씨>.
< 일본 본주의 북단 일본해의 풍랑에 찢긴 아오모리에 인접한 쓰가루 빈촌의 농가들은 이제 가장 큰 농사의 적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특산물인 사과가 주렁주렁 얼굴을 붉히고 벼이삭이 고개를 숙이면 으레 흑곰떼의 기습을 당해 농가는 한숨에 묻혀왔었다. 아오모리와 아끼다현 그중에도 쓰가루의 곰들은 짓궂고 사나왔다. 추수해둔 벼, 출하직전의 사과상자가 북새밭이 되고 몽땅 도둑맞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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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악한 적과 맞서고 나선 이가 한국청년 김재명이었던 것입니다. 기사에는 그가 마을과 농민들을 지키려고 총을 메고 산중에 들어박힌 것이 15년 전이라니,1951년경인가요?
기사는 이어 김재명 청년과 일본과의 악연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김씨는 고향이 장성이지만 부친(김향현)이 일본인 어머니와 결혼, 오사까에서 출생, 미술학교 2학년때 간부후보생으로 2차대전에 출전했다가 남양전투에서 겨우 목숨을 건져 종전을 맞았다. 부모들은 그동안 별세, 3형제중 두형이 모두 전사, 홀몸이 되었다....
그러나 김씨는 귀화하지 않았다. 한국말도 잘 모르고 고향에 가본 일이 없지만 자기가 한국사람이라고 떳떳이 자랑했다. 그렇지만 그에겐 일본관청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있었다.
한국사람이라 그런지 총기를 사고파는데 수속이 까다로워 증명이 필요하게 되어 후까우라 사무소에 외국인 등록증을 신청했었다. 분명이 대한민국이라고 했는데도 국적을 조선이라고 해주었다. 65년 9월2일에 발행한 외국인 등록증의 국적난엔 조선, 국적이 속하는 나라의 주소도 조선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으로 되어있었다.
김씨는 "조선 전라남도가 어디있느냐"면서 화를 냈다. 관리들의 이유는 간단했다. 김씨의 등록대장에 조선이라고 기록되어있다는 것 뿐이었다.
김씨는 자기가 떳떳한 한국인으로 살고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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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화하지 않은 한국인 2세의 삶, 그 삶의 고초가 어련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할 일을 찾아냅니다. 농민들의 수확을 망치는 곰, 그놈들을 잡는 일이었지요. 그가 일본사회에서 얼마나 유명했는지는 기사를 읽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동북지방 뿐 아니라 일본전국에서 `곰을 잡는 김씨'라면 어린이들까지 알게끔 되었다. 마을사람들이 신령님처럼 존대하고 따를 뿐 아니라 그가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가 갖고 있는 상장 상배가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어린이의 잡지까지도 김씨의 이야기들을 특별선전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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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씨가 곰 사냥꾼으로 자리잡기까지 겪은 고생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기자의 표현으로는 <몇권의 소설이 되고도 남는다>는군요. 김재명 청년 본인의 입을 빌어 직접 들어볼까요.
< "군대에서 배운 사격술로 이곳 산중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다가 곰 때문에 마을이 겪는 피해가 큰 것을 알고 곰사냥을 결심했지요. 처음은 6월부터 약 180일을 산중에서 살았습니다. 밥을 지어 먹어가며 숲속에 숨어 곰의 생태를 조사했지요. 옷은 누더기가 되고 고생하는 이유를 알아주는 이 없을 뿐더러 마을에선 거지취급, 상대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해두해 가면서 곰의 습성에 밝아지고 사냥성적이 차츰 나아지자 마을 사람들이 차츰 인식해주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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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곰사냥 성적은 어땠을까요.
수렵기간(11월부터 다음해 2월) 외에 유해구제(有害驅除)로 잡은 곰이 최근 6년간의 집계만으로도 136마리였답니다. 가장 큰놈은 아홉 살 짜리 ,무게는 63관이었대요. 그의 사격 솜씨는 군대에서 배운 거랍니다.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국가가 우리민족을 향해, 약소국가 민족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라고 가르쳐준 사격술로 일본 농민들을 위해 사용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닙니까.
기사 말미에는 그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올림픽에 나가는 것이래요. 그래서 <지금까지 조국을 위해 아무일도 못한 부끄러움을 씻었으면 하는 것>이 자신의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아내를 맞을 준비도 하고 있더군요. 김재명 청년은 1964년 재작년 NHK의 `어느 인생'이란 프로에 출연했는데, 그것에 일본인 처녀가 반해 결혼까지 하게 됐다는 사연입니다.
살림 밑천을 위해 청년은 클레이 사격용인 "래밍턴 108"을 팔았답니다.
사족인데, 일본 특파원 이름을 보니 <이원홍 기자>로군요.
한국일보 출신으로 먼 훗날 문공부장관을 지내고, 전두환씨의 측근으로도 유명해진 그 기자분 맞나?
늘보 <문화평론가>letitb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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