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포럼]안병영/참 원로들의 삶을 새기자

  • 입력 2001년 2월 8일 18시 37분


언제부턴가 우리는 이 땅에 진정한 원로가 없다고 자탄해 왔다. 실제로 영욕으로 얼룩진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어른이 삶의 역정 속에서 세속의 때를 너무 많이 묻힌 게 사실이다. 우리 주변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아첨과 변신으로 불사조처럼 되살아나 원로행세를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때마다 고백과 회개를 통해 거듭나는 시늉을 하는 분들도 없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며칠 전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을 찾아온 여당 인사들에게 ‘얻으려면 버려야 한다’는 충고와 더불어 ‘국민이 신뢰하는 정치’를 주문했다고 한다. 이 말씀을 들으며 우리가 이 시대에 김추기경 같은 참 원로를 갖고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역사의 버팀목 김수환 추기경▼

김추기경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우리 민족이 참으로 어려웠던 그 시절, 불퇴전의 용기를 가지고 권위주의 정권의 폭압정치에 온몸으로 맞서 인권과 사회정의의 푯대를 높이 들었던 분이다. 그의 예언자적 지표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인간화를 위해 투쟁하던 모든 이에게, 또 우리 주변의 소외되고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한 줄기 구원의 빛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역사 속에서 균형자적 자세를 잃지 않으려 애썼다. 그의 말대로 “민주화가 안됐을 때는 민주화를 이야기했고, 민주화 과정에서 혼란이 생기면 ‘그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언제나 우리가 잊기 쉬운 또 하나의 진리를 일깨워 주었다. 자유가 봇물처럼 터질 때는 평등의 의미를, 평등에 눈이 멀 때는 자유의 존귀함을 상기시켜 주었다. 정의를 추구하되 그에 못지 않게 사랑과 용서, 화해와 일치를 함께 호소했다. 그에게서 독선과 아집, 극단과 교조주의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김추기경 특유의 역사적 통찰력 때문에 그를 가리켜 ‘마지막 남은 참 원로’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한다.

원로는 뭇사람이 존경하고 의지하는 지혜로운 어른이다. 한 사회에서 원로가 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높은 사회적 경륜이 필요하다. 이에 덧붙여 원로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굳이 꼽자면 ‘마음을 비우는 일’ ‘지조와 도덕심’ 그리고 ‘사회적 책임과 헌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선 어른 노릇을 하려면, 사욕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 권력과 돈, 자리에 욕심이 지나치면, 스스로 세상을 바로 보기 어렵다. 아무리 자신을 위장해도 거짓과 정략의 냄새를 풍겨 주위의 신뢰를 잃게 마련이다. 따라서 얼마간 청정(淸淨)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다음 어른으로 존경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고 상당한 수준의 도덕성을 지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에 대해 엄격할 필요가 있다. 도덕성의 담보 없이 사회를 향해 바른 소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참된 원로는 권위를 앞세우기보다는 사회적 책임감과 지혜를 바탕으로 세상을 위해 의미 있는 봉사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얼마간의 사회참여와 헌신은 필수적이며, 누리기보다는 베푸는 삶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원로들이 빠지기 쉬운 수렁은 노탐(老貪)이 아닌가 한다. 나이가 많이 들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봉사만을 생각할 연세에, 권력과 부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온갖 세속적 일에 두루 관여하며, 각종 자리와 명예나 챙기는 분들이 적지 않다. 이들의 거짓 권위와 독단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원로 중에는 김추기경처럼 범사회적으로 존경받은 분도 있지만, 우리 사회의 각종 분야에서 원로의 반열에 오르는 분들도 많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사회는 이런 저런 이유로 이들에게 흠집을 내고 땅으로 끌어내리는 경우도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원로로 대접할 규범적 잣대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잡고, ‘원로가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우리처럼 역사의 격랑이 거칠기 이를 데 없는 나라에서, 많은 이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원로로 남는다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마음 비우고 지조 지켜야▼

그러나 실제로 이 땅에도 적지 않은 참된 원로들이 있었고, 오늘에도 실재한다. 의학계에 큰 족적을 남기고 일생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성산 장기려박사가 그 좋은 예이다. 그런가 하면 엄혹한 군사정부 시대에 빈 들판에서 홀로 정의를 외쳤던 함석헌선생이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이들의 삶을 바로 기억하자. 이들이 없었다면, 20세기 후반의 한국이 얼마나 초라했을까. 우리 시대가 3김(金)씨만의 시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안병영(연세대 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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