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 기타]패션 디자이너의 세계

  • 입력 2001년 2월 9일 18시 42분


◇패션계 막후 숨막히는 생존경쟁

테리 어긴즈 지음 박문성 옮김

311쪽 8000원 씨엔씨미디어

마치 한 편의 잘 짜여진 패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저자는 치밀하다 싶을 정도로 디자이너들의 화려한 탄생과 부활, 그리고 종말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

저자가 ‘월스트리트 저널’의 패션 기자로 10년간 패션계 구석구석을 다녔던 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내밀한 내용이다. 흥미진진함을 넘어 모델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듯한 짜릿함마저 느끼게 한다.

패션전문지 ‘WWD’의 편집장인 페어차일드가 자서전 ‘세련된 야만’에서 “진짜 문제는 패션 비즈니스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위법행위와 같다는 점이다”라고 말한 점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태도는 사뭇 용감하다.

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상세하고 치밀하게 최근 성공한 브랜드들의 궤적을 드러내고 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흥망성쇠를 따라가노라면 어느새 승자의 마케팅 전략이 슬그머니 튀어나와 살아남은 자의 가치를 드높인다. 그 중심에는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랄프 로렌’, ‘토미 힐피거’ ‘갭’이 자리하고 있다.

‘아르마니’는 ‘언컨스트럭티드 슈트’(패드나 심을 넣지 않은 부드러운 슈트)를 선보이며 세련됨을 과시했다. 그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는 할리우드였다. 리차드 기어의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는 마치 아르마니의 패션쇼를 방불케 했고, 1991년의 ‘오스카’는 ‘아르마니상’이라고 불렸다.

아르마니 이후부터 아카데미 시상식은 ‘패션계의 올림픽’으로 변모했다. 아르마니의 의상은 페미니스트 시대에 발맞춰 대히트를 쳤다. “아르마니는 여성에게 남성의 옷을 입혔다. 그는 천재다”는 찬사를 듣기에 이르렀다.

반면, 미국풍 패션의 상징으로 정의되는 ‘랄프 로렌’은 미국 사회의 주류 백인 계층의 미의식을 점령했다. ‘캘빈 클라인’은 섹시함으로 시장을 점령했으며, ‘토미 힐피거’는 인생을 즐겁게 보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 “미국은 캐주얼 웨어를 발명했다. 이 나라의 문화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 현대적인 이유는 국민의 생활방식이 현대적이기 때문이다”는 것이 그들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성공의 반열에 가장 늦게, 그러나 오래 지속하는 승자는 ‘갭’인 듯 싶다. ‘갭’은 적절한 가격과 편안한 캐주얼 웨어를 사는 여성이 늘어나면서 주목받게 되었다. 품질이 좋은 클래식한 옷, 적당한 가격, 그리고 센스있고 모던한 이미지가 잘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눈 깜짝할 사이에 높은 시장 점유율을 보였다.

이는 당시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소비 행동의 변화와 잘 맞아 떨어졌다. 지지층이 늘어나면서 ‘갭’은 패션 소매업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자가 돼 오랫동안 백화점이 떠맡아온 역할을 빼앗았다. ‘갭’의 목표는 바로 ‘고객이 원하는 것을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패션이 최전선에 등장하자 월스트리트는 유명 디자이너와 브랜드에 매력을 느껴 몇 해 전부터 패션주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모두에게 장밋빛 인생이 예고된 것은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디자이너 브랜드와 월가는 서로 융합되기 어려웠고, 대량 생산 우량 기업들만이 행운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그렇다면, 반문해 보자. 소비자 모두가 하이 패션계에 등을 돌렸다고 가정하면, 세계는 그 때부터 면 바지와 티셔츠 일색이 될까? 아니다. 저자는 그 특별한 성공의 예로 뉴욕의 디자이너인 졸랑 리다코빅을 들고 있다.

최근 늘어가는 경제력있는 여성의 기호와 딱 맞아 떨어지는 그의 패션은 희소성을 추구하는 원칙을 고수한다. 양을 늘이지 않고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는 그의 원칙대로, 졸랑의 옷을 판매하는 체인은 전세계적으로 고작해야 60여군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패션을 하려면 과학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저 잘 팔려야 한다. 요는 바로 이것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패션 제국 LVMH 회장인 베르나르 아르노의 생각을 대변하는 듯하다. “팔리지 않으면 디자이너는 존재이유를 잃는다. 패션은 순수예술이 아니다. 패션을 창조한다는 것은 가능한한 많은 고객이 자신의 제품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헛소동’에서 ‘의복을 헌옷으로 만드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유행이다’라고 이미 예견한 바 있다. 그의 예언처럼 유행이란 덧없고 멈출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움직인다.

어느 특정 스타일이 멋있는 것으로 인정되는 때란 그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그 스타일을 받아들이는 경우다. 패션이란 그런 것이다. 유행의 중심엔 항상 사람들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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