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민병욱]어떤 분반(噴飯)

  • 입력 2001년 2월 12일 18시 40분


분반(噴飯)이란 입에 든 음식을 내뿜을 정도로 웃음을 참지 못한다는 말이다. 느낌 있게 그 표현을 사용한 사람으로 고 조지훈 시인을 꼽을 만하다. 해방 이듬해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유명한 3인시집 ‘청록집’을 펴낸 그가, 바로 그 책 때문에 분반하였다는 것이다.

청록집은 향토색 짙은 서정시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출판 당시 찬사만 받은 건 아닌 모양이다. 일부 비평가들이 세 시인의 작품을 “생활이 없는 시의 표본”이라고 공격하고 나섰다.

특히 조시인이 ‘완화삼’에서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라고 한 부분에 대해 비판이 쏟아졌다. 그들은 “인민은 쌀을 달라, 독립을 달라며 아우성인데 밀주가 익는 강마을을 찾아다니는 시인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가. 그 시는 생활이 없는 시다”며 꾸짖었다는 것이다.

▼언론탄압위한 세무조사 실토▼

지훈은 이에 “분반하였다”는 말로 답변했다. 어이없어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그는 “당신들은 생활을 정치적, 경제적 생활 또는 동물적, 물질적인 것의 동의어로만 보는데 나는 생활의 의미를 그런 데서 찾지 않는다. 전란 중에도 아기는 태어나듯 암흑의 계절에도 방랑은 있다”며 반박했다.

서정시를 그냥 서정시로 봐주지 않고 이념이 있네 없네 비판하니 당사자로서는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연과 향토에 탐닉해 최상의 시어를 찾는 시인에게 백성의 삶을 글로 써야지 웬 밀주타령이냐고 손가락질한다면 풋― 웃는 것 외에 별 뾰족한 수가 있을까. 도무지 꼬투리 잡을 일이 아닌 것을 제 기준으로만 생각해 꼬투리 잡는 행위를 지훈은 분반할 일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지훈의 분반과는 유가 다르겠으나 요즘 정치판에 이런 분반할 일이 많다. 어이없어 헛웃음을 짓는 일이 많다.

그걸 만드는 대표적인 사람이 김영삼 전대통령이다. 이 정치를 뜯어고쳐 보겠다는 충정은 이해가 가는데 그의 비판이란 것이 요령부득이다. 서정시인에게 왜 이념이 없냐고 비판했던 논객들은 어쭙잖은 논리라도 댔지만 김전대통령의 얘기에는 그런 논리조차 없다.

지난 몇 년간의 얘기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최근 언론사 세무조사와 안기부 돈의 구여권 선거자금 유입사건에 대한 그의 발언은 모두 안하니만 못한 말뿐이다. 청록파를 비판했던 논객들과 비교한다면 스스로 밀주를 만들어 냈으면서도 왜 당신은 밀주타령이나 하느냐고 윽박지르는 형국이다.

지난주 그는 도쿄에서 자신의 재임 중 언론사 세무조사를 한 결과 일부 언론은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으나 적당히 봐줬다고 말했다. 또 언론사로부터 추징할 세금이 많았지만 깎아주었다는 말도 했다. 물론 그는 이번 세무조사가 분명한 언론탄압이라는 것을 강조하느라 그런 말을 했다지만 스스로 재임 중 언론탄압을 위한 세무조사를 했고 또 그를 적절히 이용했다고 실토한 꼴이 됐다.

이쯤 되면 언론을 비판한 건지, 정부의 세무조사를 비판한 건지, 아니면 자신의 재임 중 세무조사가 부당했노라고 실토한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안기부 돈 문제도 그렇다. 그동안 김전대통령은 재임 중 단 한푼도 정치자금을 받지 않았다고 공언해왔다. 국민도 그의 아들이나 측근은 부정한 돈에 손댔지만 김전대통령만은 깨끗했을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런 그가 안기부 돈 문제와 관련해 말을 바꿨다. “신한국당에 돈을 주려는 기업들이 많았기 때문에 (안기부 돈을) 끌어다 선거자금으로 쓸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한심한 얘기다. 국고수표로 신한국당에 들어간 돈이 안기부 예산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느라 그랬는지 모르나 결국 재임 중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러고도 안기부 돈 수사는 야당 죽이기라고 큰소리치니 역시 여권을 비판하는 건지, 당시 신한국당을 비판하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 돈 받은 걸 실토하자는 건지 알 수 없게 버무려놓았다.

▼언제까지 헛웃음거리 되려나▼

묵묵히 멋들어지게 나름의 시 세계를 구축한 청록파와 할 말 안할 말 가리지 않는 김전대통령을 함께 논하는 건 격에 맞지 않는 노릇이다. 다만 김전대통령에게 하고싶은 얘기는 갈고 다듬은 말을 내놓진 못할지언정 국민이 분반하는 말은 삼갔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만큼의 민주화에 공이 있는 그가 언제까지 국민의 헛웃음거리가 돼야 하나.

민병욱<논설위원>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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