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허수경 9년만의 새시집 ' 내영혼은 오래…'

  • 입력 2001년 2월 12일 18시 50분


◇유적 발굴하듯 내면의 상처 해부

9년 전 홀연히 독일 유학길에 올랐던 허수경씨(37·사진)가 신작 시집을 보내왔다. 14일 발간되는 세 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창작과비평사).

섬세한 감수성과 세련된 글솜씨로 따스한 허무를 일궜던 전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88년) ‘혼자가는 먼집’(92년)과 비교해보면 이번 작품은 낯설다.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오랜 기간을 보냈기 때문일까.

그는 새 시집의 첫번째 시 ‘나는 어느날 죽은 이의 결혼식을 보러 갔습니다’에서 ‘신랑은 심장을 도려냈어요 /자궁만이 튼튼한 신부는 신랑의 심장자리에 /자신을 밀어넣었습니다’고 노래하더니, 마지막시 ‘물빛’에서는 세숫대야에 떠 놓은 물에서 ‘불안한 맑은 빛 /서성이는 이미 물빛이 된 /내 어린 지친 얼굴’을 떠올린다.

또다른 시에는 외신 뉴스에서 보았을 법한 탱크와 울부짖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따스한 물이불을 덮고 잠든 고아가 있다. ‘탱크 안에 목 잘린 태아가 웅크리고 있기’도 하고 ‘자망자망 꿈으로 들어가는’ 아이들이 출몰하기도 한다.

허씨는 수천년 전 유적을 발굴하듯 내면에 묻혀있는 상처의 잔재를 파내려간다. 구체적인 설명없이 내면의 심연으로 직행하는 신화적 상징은 독자들의 해석을 쉽지않게 만든다. 마치 눈 밝은 이의 해독을 기다리는 ‘오래된 문자로 쓰여진 편지’처럼.

그의 시를 암송한다는 소설가 신경숙은 “불우함마저도, 병마저도 눈이 부시고 찬란하고 애살스러워 기어이는 관능적이기까지 했다”는 소감을 발문에 적었다.

독일 뮌스터에 머물고 있는 허씨는 최근 전화통화에서 이 시집을 “지난 8년간 내 속을 들여다보면서 발견해낸 컬러풀한 내면의 모습을 틈틈이 기록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근동(近東) 고고학 전공으로 박사 논문 준비에 한창인 그는 최근 대학교에서 조교 자리도 얻은데다 연구지원금까지 받아서 당분간 귀국하지 못할 것 같다고 전했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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