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보의 옛날신문 읽기]60년대의 보이시룩 밀리터리룩

  • 입력 2001년 2월 13일 11시 34분


그렇게 춥던 겨울도 이제 한걸음 뒤로 물러난 것 같습니다.

신문을 들쳐보니 벌써 봄패션 기사가 심심찮게 눈에 띄네요. 며칠전 동아일보에도 <퓨전은 가라, 흑백의 유혹>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더군요. <흑과 백이라는 원초적 색상들이 새봄을 앞둔 선남선녀들을 유혹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보릿고개 시절에도 패션은 있었지요. 당시 기자들은 요즘 기자들보다 성급했는지, 동장군이 한창 기승을 부리는 1월에 벌써 봄패션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먼저 67년 1월15일자 조선일보를 보실까요.

< 유행은 흐른다. 한색계에서 난색계로, 구상문에서 추상문으로, 포르메에서 데포르메로 흐른다. 여태까지의 추세를 바탕으로 올해 펼쳐질 여성의 유행을 전문가들로부터 다음과 같이 살펴보자.>

첫부분부터 어렵기 짝이 없습니다. 한색계니 추상문이니 하는, 요즘은 잘 쓰지 않는 말이 막 튀어 나옵니다. 어휴, 포르메와 데포르메는 또 뭡니까. 하여튼 계속 읽어보자구요.

< 67년은 아름다움에 대한 여성들의 동경이 옷을 통해 잘 나타나 옷이 예술성을 띌 것이다라는 디자이너들의 말이다. "전에는 봄에 입는 색, 가을에 입는 색이 밝은 색조와 침착한 색조로 구별이 되었으나 지난 가을과 겨울은 화려한 색으로 일관했다. 이런 경향은 금년도 더할 것으로 보아 앞으로는 색조에 의한 계절의 구분은 없을것"이라고 복식연구가 서수정씨는 말한다.

또 미술형태가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가는 세계적인 추세로 보아 옷감의 무늬도 현대추상화같은 도안이 나올 것같다.

약 4년전부터 보이시루크(사내아이같은 옷)니 밀리터리루크(군복같은 모양)니 하며 여자의 옷이 남성적인 경향을 보여왔으나 지난해부터는 다시 우아한 여성적인 선이 선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너무 몸에 꼭 끼는 것이 아니라 "보기에도 부드럽게 맞는 옷"(앙드레 김)이 유행할 듯하다....>

60년대에 이미 보이시룩, 밀리터리룩이 있었군요. 기사 첫문장대로 유행은 흐릅니다.

이제 같은 해 1월27일자 경향신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 올봄 패션계에는 어떤 옷이 유행할까. 각국에서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자주 보도되는 미니스커트는 한국에 상륙할것인가? 해마다 변해가는 세계패션의 물결 속에서 한국 의상계는 어떤 새봄의 모드가 유행할까. 의상전문가들에게 들어본다.>

경향신문 기자의 눈은 세계화가 되어 있군요. 수십년 후에 우리가 세계화 때문에 난리칠 줄 예견했나 봅니다. 계속 읽어보자구요.

< 새봄 한국 의상계의 색깔은 밝은 진달래색이 될 것이라고 양장가에서는 내다본다. 요즈음은 가을에 유행한 모드가 겨울동안 계속되어 봄까지 유행되는 경향이 짙어진다. 그래서 작년 가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핑크 계통의 색깔이 올봄에 더욱 대담하고 화사한 분홍빛깔로 나타나리라는 것.

실상 붉은색 계통의 염료를 사가는 염직회사가 작년 가을부터 늘기 시작해서 겨울동안 부쩍 많아졌다고 염료회사들은 증언한다....>

앞뒤로 있는 다른 기사들도 몇편 더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니 대부분 대동소이해요. 또 한가지, 옛날신문 스크랩을 뒤져보니 유행과 패션은 과연 돌고 도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생기는겁니다.

막스 폰 뵌이 쓴 <패션의 역사>라는 책을 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많습니다. 저자가 문화사가여서 그런지 당대의 역사와 패션을 연결지어 저술한 점이 이채롭습니다.

예를 좀 들어볼까요.

홀딱 벗는 노출패션도 혁명전과 가운데 하나라네요.

18세기 말 프랑스 파리에서는 앙시앙레짐을 깨부수는 대혁명이 발생했지요. 혁명은 여성들에게도 자유를 선물했습니다.

폭압정치의 대명사였던 자코뱅당이 무너지자 여성들은 앞다퉈 옷을 벗기 시작했지요. 노출이 시작된 겁니다. 특히 여성들은 코르셋과 패티코트를 벗어던지고 자신들의 육체에 자유를 주었습니다.

여성들에게는 잘 차려입는 것보다 잘 벗은 패션이 화두였대요. <누가누가 더 벗나>가 관심사였다니, 오오, 재밌어라.

숙녀들은 사교모임에서 옷무게를 재는 게임까지 즐겼다지요. 여자의 옷은 구두와 장신구까지 합해 16g을 넘어서는 안됐다고 합니다.

독일에서는 한 여배우가 <파리스의 심판>이라는 연극에서 완전나체로 무대에 올라, 유럽인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고도 하지요.

혁명은 계속됩니다. 의상에서도 혁명은 계속되지요.

혁명 당시 공화당원은 대부분 긴 바지를 즐겨입었답니다. 긴 바지? 그것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표시하는 기호요 상징이었던 것이지요.

재밌지요? 더 들려드릴까요?

16세기 여성들은 가슴을 되도록이면 많이 노출하고 싶어했지요. 교황 인노켄티우스는 대경실색했습니다. 노출의상을 사이에 두고 여성들과 교황 사이에 벌어진 신경전은 치열하기 짝이 없었답니다.

누더기 패션 아시지요? 이게 또 역사가 유구합니다.

30년 전쟁 당시 군인들은 자신들의 용맹함을 자랑하려고 창칼에 찢긴 누더기를 벗지 않고 그냥 입었대요. 이게 누더기 패션의 원조입니다.

책에는 없는 얘기입니다만, 옛날 일본 유학생 출신의 소설가가 쓴 수필같은데서 읽은 것으로 기억되는데, 1920~1930년대 일본 학생들 사이에서는 야만풍(野蠻風)이란게 유행했었대요. 새 교복을 일부러 낡은 교복으로 만들어 입곤 했다는 겁니다. 이것도 누더기 패션이겠지요?

그런데 도대체 패션이란게 뭘까요? 패션은 팍티오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팍티오는 원래 뭔가를 만들고 제작하는 행위나 활동을 뜻했다지요. 그런데 이 정도 설명 가지고는 성에 안찹니다.

다시 막스 폰 뵌의 책을 보면 이렇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서구에서 최초의 유행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십자군 원정 때였다고 합니다. 십자군의 기치 하에 다양한 민족이 한자리에 모이다보니, 다른 민족의 패션을 바라보는 시각이 생기게 됐다는 겁니다.

그러나 패션이 전세계적 현상이 되는 시기는 한참 나중의 일이었지요. 오늘날과 동일한 의미의 패션이 등장한 것은 17세기 말 프랑스 궁정이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파리는 세계 유행의 중심지가 됐지요. 유행은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나왔고, 그 궁정에서 나온 프랑스의 궁중 패션은 전세계로 퍼져나갔지요. 유행이라는 말이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고 합니다.

늘보<문화평론가>letitb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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