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은 '도예 천국' 같은 곳▼
영국의 유명한 공예가인 버나드 리치는 “공장에서 생산되는 기성품의 주된 목적은 팔기 위한 것이고 미학적인 고려는 두 번째”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어린 시절을 이렇게 따분하고 인간적인 향취가 전혀 풍기지 않는 ‘공장표’ 생활을 하며 지냈다.
하지만 한국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1977년 주일본 대사관에 근무할 당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문화적 충격에 사로잡혔다. 특히 난생 처음 접해본 한국의 도예문화에 나는 완전히 매료됐다. 우연히 한국 친구들의 안내로 경기 이천시를 찾아간 나는 처음으로 ‘손으로 만들어진’ 모든 종류의 도예품과 만났다.
장식용 접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반찬그릇, 국그릇, 잔은 물론 ‘손으로 만든’ 모든 것이 있었다. 도예산업이 걸음마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캐나다 출신이어서인지 한국 도예의 아름다움에 비교될 만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마치 ‘도예 천국’에라도 와 있는 기분이었다.
리치는 “한 사회의 도예는 그 문화의 정수”라고 말했다. 이천시는 그 말을 확인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한 도예가의 아름다운 작품을 보고 나서 나는 이를 확신하게 되었다. 그 도예가의 작업실을 찾아보기로 작정한 나는 한국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이천시로 무작정 차를 몰았다.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를 돌아 작은 오솔길 사이로 끝없이 펼쳐진 논밭을 지났다. 그 날은 비가 내렸고 오솔길은 진흙탕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도착한 그의 작업실에서 나는 그 아름다운 청자들, 즉 한국문화의 정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행복감은 갑작스럽게 사그라지고 내 마음은 무거워졌다. 실망스럽게도 그 도예가는 작업실의 모든 작품이 한 일본인 고객의 주문에 따라 만든 것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줄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차를 한잔 얻어 마시다가 그 작은 찻잔에서 또다시 한국 도예품의 매력에 탄복했다. 한국인 친구의 통역으로 서로 다른 언어로 이뤄진 대화를 통해 우리는 한국 도예에 대한 공통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작품 중에 한가지를 고르도록 내게 허락했고 나는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한 점을 골랐다. 그리고 그 작품은 서울에 있는 나의 집에서 아직도 빛을 발하고 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느라 그의 연락처와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그의 작품에 남겨진 ‘이지(二之)’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그를 찾을 수 있다면 꼭 다시 만나고 싶다.
나는 1998년 여름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20년 전에 경험한 한국의 도예 전통은 하나의 도예 문화로 자리잡아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천, 광주, 여주는 1977년에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진 곳이 되어 있었다. 도예촌은 훨씬 더 발전해 있었다. 디자인은 놀랄 만큼 다양해졌다. 또 다른 변화는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한꺼번에 팔지 않고 한 작가의 작품만 전담해서 파는 상점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도예지 지도 있었으면▼
하지만 한국의 도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한가지 바람이 있다. 외국인들이 지도를 들고 도예가들의 작업실을 찾아다니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정말로 한국의 도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도로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도자기 전시장이 아니라 도예가 개인의 작업실에 가보고 싶어한다. 도예를 통해 한국문화의 정수를 느껴보려는 사람들에게 도예지를 찾아갈 수 있는 정확한 지도나 표지판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에버 라이스(주한 캐나다대사관 참사관)
▼약력▼
캐나다 온타리오주 세인트 토머스에서 태어나 1961년 웨스턴 온타리오대를 졸업하고 토론토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74년에 외교관 생활을 시작해 주일대사관에서도 근무했으며 81∼83년 한국에서 영사로 근무했다. 98년 다시 한국에 부임해 정치담당 참사관으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