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IN&OUT]<순자>는 계속되야 한다

  • 입력 2001년 2월 16일 18시 10분


SBS의 수목드라마 <순자>가 요즘 시끄럽다. 방송 초부터 연예계 실상을 다룬다고 해서 화제를 모으더니 드라마가 시작되자 내용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술렁이고 있다.

무엇보다 극중에 등장하는 배역들이 실제 연예계 스타나 명사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우선 정애리가 맡은 퇴락한 배우 황승리의 연기나 주위에 대한 묘사가 장미희를 떠올리게 하고, 묘한 분위기의 디자이너 피엘 장(김병기 분)은 인기 디자이너 앙드레 김과 하용수를 합쳐놓은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대부분 연예계 실태를 냉소적인 시각으로 그린 <순자>에 대해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연예인들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사실처럼 다뤄 부정적 이미지를 확산시켰다며 불쾌해한다고 한다. 등장인물의 실제 모델로 거론됐던 디자이너 앙드레 김과 같은 경우는 방송사에 직접 항의를 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소란 속에 최근에는 극중에 정찬이 성인용 비디오를 두고 "쓰레기"라고 표현한 것이 새로운 문제가 됐다. 방송위에서는 '특정 직업 종사자에 대해 부정적인 묘사'를 했다고 해서 '주의'를 주었고, 성인 비디오업계는 법적인 조치까지 하겠다고 흥분하고 있다. 심지어 극중에 문제의 대사를 말했던 정찬은 나중에 자신의 의견과는 무관하다는 보도자료까지 돌렸다.

<순자>를 바라보는 언론의 시각도 연예계와 별로 다르지 않다. 자극적인 소재와 선정적인 표현으로 말초적인 흥미를 자극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부 보도에서는 명예훼손 고소의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아마 한 편의 드라마를 두고 이렇게 논란과 비난이 쏟아진 적도 별로 없을 것이다. 결국 제작진은 드라마의 내용을 대대적으로 손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과연 <순자>의 내용은 다루어서는 안될 금단의 소재인가?

존 트라볼타가 나온 <프라이머리 컬러스>란 영화가 있다. 존 트라볼타가 대권에 도전하는 정치가로 나오는 이 영화의 소재는 정치인의 스캔들이다. 존 트라볼타는 극중에서 겉으로는 온화하고 가족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애를 쓰지만, 실제로는 어린 소녀와 섹스 스캔들을 일으키는 인간 말종에 가까운 인물이다. 이 영화는 회색 머리에 퉁퉁한 몸집을 한 존 트라볼타의 모습이 클린턴 대통령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특히 클린턴이 한참 성추문으로 특별검사인 스타 변호사에게 시달리고 있을 당시 나왔기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됐다. 하지만 이 영화를 두고 클린턴 대통령이 펄펄 뛰며 항의를 했을까?

우리 시각으로 보면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지닌 인물중 하나인데, 자신을 천하의 거짓말쟁이에 난봉꾼으로 연상시킬 수 있는 영화를 왜 막지 않았을까? '어딘가 구린데가 있어 저러지'라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무서워서…. 아니면 정치인이라는 위치 때문에….

또 한 편의 영화를 보자.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플레이어>란 작품은 할리우드를 이리저리 빗댄 영화이다. 영화만 보면 할리우드에 있는 인간들은 어느 하나 건전하고 정상적인 사고가 아니다. 남의 뒷통수나 치고, 하나에서 열까지 돈과 흥행에 관련된 시각으로 판단을 하고, '예술'이라는 수식어보다는 '협잡꾼'이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비열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브루스 윌리스부터 줄리아 로버츠, 우피 골드버그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할리우드 스타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한없이 비꼰 이 작품에 왜 무보수로 출연할 정도로 열정을 보였을까?

알트만의 또 다른 영화 <프레타 포르테>(국내에서는 <패션쇼>로 출시)에서는 파리 패션계 인사들의 모습을 속물적이고 성적으로 문란한 인간들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 영화 때문에 고소를 당했다는 보도는 접하지 못했다.

굳이 외국의 예를 들 것도 없다. 국내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최근 몇 년 전부터 즐겨 다루는 소재는 정치인의 풍자이다. KBS <시사터치, 코미디 파일>에서는 매 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치인들이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때로는 특이한 말투나 제스처로, 어떤 때는 정치권에 떠도는 가십 때문에 개그맨들의 풍자로 난도질 당한다. 하지만 그 내용을 두고 '정치인의 이미지를 비하했다'며 정당의 대변인들이 항의 성명을 낸 적은 없었다.

드라마가 현실의 기반 위에서 펼쳐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현실 그 자체일 필요는 없다. 드라마가 '허구의 세계'인 것은 '현실'이라는 대지 위해 자유로운 창의력으로 상상의 건축물을 마음껏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드라마의 내용과 현실을 마치 시험 답안지 맞추듯 대조하곤 한다. 그래서 맞으면 그 표현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를 두고 논란을 벌이고, 맞지 않으면 "현실성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드라마 내용이 특정 집단이나 직업, 종교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면 모든 세상의 평가와 시선이 그런 것처럼 난리가 난다.

더구나 <순자>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실명은 거의 없다. 즉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다. 극중에서 이들의 모습이나 주변 묘사를 보고 특정인물을 떠올리는 것은 시청자의 자유의지이다.

물론 <순자>가 탁월하게 높은 극적 완성도를 가진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작위적인 사건 전개에 정형화된 인물들의 성격, 그리고 미스 캐스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일부 연기자들의 연기는 종종 '내가 왜 이 드라마를 보고 있지'라는 후회를 들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드라마적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드라마 소재의 제한을 받거나 표현의 제약을 받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일본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감독중 한 명인 오시이 마모루가 한국에 왔을 때 "일본 애니메이션의 폭력과 과도한 성적 표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때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모든 창작물의 95%는 쓰레기이다. 예술 작품은 5% 밖에 안된다. 하지만 그 5%를 만들기 위해서는 95%의 쓰레기가 나와야 한다. 처음부터 5%의 예술작품만 만들 수는 없다. 그러면 95%의 쓰레기 같은 작품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관객에게 맡기라고 말하고 싶다. 제대로 만들지 못한 작품에 대해 관객은 외면하고 잊어버린다. 어느 누가 관객이 외면하고 잊어버리는 것을 만들고 싶겠는가?"

만들기도 전에 '이런 소재는 안되고, 이런 시각은 곤란하고'하며 금을 긋기 시작하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베를린 영화제 본선에 오른 우리영화 <공동경비구역 JSA>가 주목을 받은 것이 무엇때문인지 생각해 보면 상황은 분명하다.

<순자>는 내용을 바꿀 필요가 없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 oldfie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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