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18년째인 소설가 김인숙이 최근 발표한 8편의 단편을 묶어 냈다. 여기서 그녀의 관심은 여성적 정체성 탐구에서 좀더 보편적인 실존 탐구로 나아가고 있다. 현실과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진지하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구조조정으로 퇴직한 은행원, 8년을 시간강사로 전전하다 어렵게 국립대학 교수가 된 사내, 속도경쟁에 소모되는 카피라이터 등이다.
꿈으로부터 버림받고 인생이 무료해진 이들은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거나 ‘한 번도 존재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조한다.
지난해 현대문학상을 받은 ‘개교기념일’은 이혼재판을 받기로 한 날 사고로 남편을 잃고 졸지에 이혼녀 대신에 미망인이 돼버린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자기 존재감을 상실한 그녀를 이웃에 사는 한 남자가 좋아한다.
그는 고장난 그녀의 컴퓨터 파일을 복구해주다가 일기장을 훔쳐본다. 그러나 그는 여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애틋한 사랑이 잡힐 듯하다 날아가 버린다.
이처럼 삶의 뒤편으로 밀려난 이들의 결말은 대부분 허전한 뒷맛을 남긴다. 삭막한 세상을 견뎌내는 주인공들은 잔뜩 움츠려있거나 혼자 중얼거린다. 그것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안간힘인 것처럼.
작가가 삶의 회의를 온몸으로 통과한 인물을 통해 보여준 해답은 퍽이나 애처로운 것이다. ‘삶은, 소망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당위와 견딤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길’에서).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