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은 해방 직후 민족분단을 예견하고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우사 김규식(尤史 金奎植) 선생을 도와 좌우대립의 회오리 정국 속에서 중도노선을 걸으며 평생 좌우합작 남북협상 등 통일로 가는 길을 걸었던 선각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1948년 4월 김구(金九) 김규식 선생 등과 함께 평양에 다녀왔으며 4·19 이후에는 혁신계 정당활동을 하다 고초를 겪기도 했다. 고인은 생전에 “평생 오로지 통일을 위해 일해 왔으며 통일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해 왔다.
해방 직후 좌우합작위원회 우측비서, 김규식 입법위원 의장 비서실장, 민족자주연맹 비서처장 및 상임위원을 거쳐 1948년 남북협상민족자주연맹 대표 등을 맡았다.
1961년 혁신계 정당들의 대동단결을 위해 윤길중 고정훈 등과 통일사회당을 창당했으나 이로 인해 5·16 직후 2년반 동안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70년대 초 민족통일촉진회를 설립해 활동했으며 90년 초부터는 김규식 선생을 추모하는 우사연구회 회장을 맡아 왔다.
지난해 7월에는 강만길(姜萬吉) 고려대 명예교수, 심지연(沈之淵) 경남대 교수, 서중석(徐仲錫) 성균관대 교수 등과 함께 ‘송남헌 회고록:김규식과 함께 한 길’을 포함한 ‘우사 김규식 전집’(전 5권)을 간행하는 등 마지막까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밖에도 고인은 ‘해방 30년사’ ‘한국현대정치사’ ‘해방 3년사’를 집필해 우리 현대사 연구에 기여했다.
유족으로는 재영(독일 뮌헨시립대 학장), 재웅(㈜보험월드 대표), 재홍씨(자영업) 등 세 아들과 딸 여희, 여주씨가 있다. 부인 이정구(李貞求)씨와는 94년 사별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영안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2일 오전 9시. 02―760―2011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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