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로 '제2의 고골리'라는 찬사를 받은 러시아 문학의 대부. 오랜 유형생활에서 얻은 러시아민중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작품의 토대가 됐다.
화려한 문단 데뷔, 사형 언도도스토예프스키는 모스크바의 마린스크 빈민구제병원의 관사에서 태어났는데, 군의관인 아버지는 신경질적이고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반면 어머니는 모스크바의 부유한 상인의 딸로서 방 두 칸짜리 좁은 관사에서 가정, 하인, 마부 등을 거느리는 모순된 생활을 하다가 도스토예프스키가 16세 되던 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했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837년 형 미하일과 함께 페테르부르그 공병학교에 입학했고, 졸업과 더불어 공병장교로 근무했다. 그러나 1년도 못돼 이모로부터 1만 루블의 유산을 물려받자 군에서 제대하고 문필생활을 시작했다. 이 무렵 도스토예프스키는 같은 공병학교 출신
의 작가 그리고로비치와 한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도스토예프스키가 몰래 완성한 단편소설을 읽고 크게 감동한 그리고로비치는 즉시 당대 최고의 비평가 벨린스키를 찾아가 작품을 보여줬고, '새로운 고골리가 탄생했다'며 흥분한 벨린스키는 그날 밤으로 도스토예프스키를 찾아왔다. 그 작품이 도스토예프스키를 단숨에 유명하게 만든 처녀작 〈가난한 사
람들〉이다. 1848년경 그는 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1849년 황제의 밀정에 의해 밀고돼 사형을 언도 받았다. 처형대 두 번째 줄에 서서 죽음을 기다리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총살 직전 황제의 특사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시베리아 유형, 간질병 그리고 도박절대절명의 위기에서 시베리아 유형으로 감형된 도스토예프스키는 옴스크 감옥에서 4년 동안 유형생활을 한다. 죄수들과의 생활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회주의 혁명가에서 슬라브적 신비주의자, 민중적 종교주의자로 완전히 변신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도스토예프스키는 지병인 '간질병'을 앓게 됐다. 출옥한 다음 5년 동안 중앙아시아에서 병졸로 더 근무하고 1859년에야 비로소 그는 페테르부르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수도로 돌아온 도스토예프스키는 형 미하일과 함께 《브레먀》라는 잡지를 운영하며, 장편 《학대받는 사람들》(1861)과 시베리아 옥중생활을 바탕으로 한 《죽음의 집의 기록》(1864)을 발표해 문단에 복귀했다. 러시아에서 농노제가 폐지되며 사회분위기가 점차 험악해지던 1862년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첫 서구여행을 떠났다.
이 서구여행은 그에게 슬라브 민족주의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브레먀(시대)》지의 폐간으로 형 미하일은 다시 잡지 《에포하(연대기)》지를 발간했지만 이 잡지는 크게 실패하고 형과 아내는 죽고 말았다. 결국 거액의 빚과 형의 식솔들까지 떠맡은 도스토예프스키는 빚쟁이들의 독촉을 피해 해외도피생활을
시작했다. 해외에서의 극심한 생활고와 상실감은 도스토예프스키로 하여금 정신없이 도박에 빠져들게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시간과 돈 모두 부족한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그는 속기사를 채용해 자신이 소설의 줄거리를 구술하면 속기사가 원고를 받아적도록 했다.
이렇게 해 소설 《노름꾼》(1866)는 26일만에 탈고했고, 이어 《죄와 벌》(1866)이 완성됐다. 작가와 속기사와의 관계가 발전돼 둘은 1867년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내성적 성격에다 질투심도 강했고, 종종 간질병 발작을 일으켰는가 하면 전처의 자식들과 조카들이 생활비를 타내러 찾아와서 괴롭히곤 했기 때문이었다. 성실한 아내인 안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창작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두 사람은 독일과 스위스로 떠났고 이 해외여행은 4년에 걸쳐 이어졌다.
독일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에 다시 빠져들었다. 그는 주변사람들에게 손을 벌리는가 하면 심지어 아내의 물건까지 저당잡히며 도박을 했다. 그의 병적인 도벽은 1872년 독일연방정부가 도박금지령을 내리고서야 비로소 치유될 수 있었다. 그처럼 무절제한 생활 속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장편소설 《백치》(1868) 《악령 》(1872) 등을 출간했으며 귀국 후에는 마지막 대작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1880)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1881년 1월 28일 폐기종이 악화된 도스토예프스키는 고난과 열정으로 점철된 거인의 삶을 마감했다.
어둠의 자식들도스토예프스키는 생애의 마지막 3년(1878-1880) 동안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을 집필했다. 이때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자신의 진정한 숭배자이자 성실한 아내인 안나의 도움으로 평생 처음 정신적·경제적 안정을 찾은 시기였다. 60세를 바라보는 노작가는 역경을 헤쳐온 일생과 문학적 경험을 정리하고 싶어했고, 자신의 창작적 역략을 집중시킨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을 인류의 운명에 대한 철학적 종교적 예언서로 완성했다. 그리고 마치 소설이 끝나길 기다렸듯 완성 석달만에 비범하고 기이한 생애를 마쳤다.
1868년부터 구상된 이 작품은 처음에는 '무신론' 혹은 '위대한 죄인의 생애'는 제목으로 계획됐으나, 최종적으로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이란 제목이 붙었다. 본래 카라마조프란 '검다'라는 터키어 '카라'와 '칠하다'라는 러시아어 '마자찌'의 결합어로 '어둠의 자식들'이란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증오와 욕망의 세계를 살아가는 악의 화신인 표도르와 그 자식들의 운명을 통해 인류의 구원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어머니가 물려준 유산을 아버지 표도르로부터 받아내려는 드미트리, 중재 요청을 받은 이반, 견습수도승 생활을 하던 알료샤 등 흩어졌던 이복형제 세 사람이 고향 마을에 모이면서 카라마조프 집안의 잠재된 가정불화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큰 아들 드미트리는 처음에 금전문제로 아버지와 충돌하다가 급기야 그루쉔카라는 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로 발전한다.
둘째 아들 이반은 자신의 니힐리즘을 하인이자 아버지의 사생아인 스메르쟈코프에게 전염시켜서 아버지의 살해를 은밀히 교사한다. 셋째 아들 알료샤는 아버지와 형들 사이를 오가며 파국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결국 아버지는 피살당한 시체로 발견된다. 평소에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호언하던 드미트리는 주위 사
람들의 증언과 그의 몸에서 발견된 3천 루블 등 결정적 증거물 때문에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만다. 하지만 실제로 아버지를 죽인 사람은 누구일까? 또한 카라마조프라는 악마의 피가 흐르는 이복형제들에게는 과연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 글쓴이 이대우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대학, 파리8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러시아 세계문학연구소에서 '예세닌과 한국농민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북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예세닌의 신농민문학 연구〉, 〈미래주의 시어〉 등이 있으며, 저서
〈러시아 문학개론〉(공저)과 역서 《부활》, 《그후의 세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