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보면 민주화에 기여한 업적에 따라 김대중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여론조사의 결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과학기술 정책을 잘못한 대통령을 가리기 위한 설문조사에서 드러난 순위이다. 1998년 9월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소속의 한 국회의원이 대덕연구단지의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김대통령이 불명예스러운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연구개발비 확대 긍정적 평가▼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의 여파로 정부 출연 연구소에 대한 투자 축소와 인력 감축 등 구조조정이 강행되던 시기에 여론이 호의적일 수만은 없었을 테지만 취임한지 겨우 반년을 넘긴 현직 대통령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가 아니냐는 동정론이 일기도 했다.
그렇다면 집권 4년째에 접어드는 요즈음 김대통령의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중요한 평가기준은 대선공약의 추진 실적이다.
김대통령이 후보로 내건 과학기술 정책의 대선 공약은 과학기술 대국과 정보주도 국가 구현 으로 요약된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설정한 국민의 정부 100대 과제 에는 정보통신 기초과학 환경문제 등 과학기술 과제가 상당히 포함돼 있으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연구개발투자를 국민총생산(GNP) 대비 5%로 확대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이 공약은 선진국에서도 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의욕적인 것이었지만 김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로 목표가 달성되고 있어 과학기술계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연구개발 예산을 2002년까지 정부 예산의 5%로 증액하기 위해서 1999년 3.7%, 2000년 4.1%, 2001년 4.3%로 해마다 꾸준히 늘려가고 있다.
또 다른 주요 대선공약은 대통령 직속의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신설이다. 1999년 같은 이름의 조직이 설치됐다. 과학기술정책 종합조정기구가 종래의 과학기술장관회의에서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로 그 지위가 격상된 셈이다.
그 밖에도 국민의 정부는 21세기 프론티어 연구개발 사업, 선도기술개발 사업, 벤처기업과 과학기술의 연계 등 실적을 올리고 있으나 과학기술계의 평가가 반드시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선 구조조정의 후유증으로 과학기술자들의 사기가 저하됐다. 물론 기득권 세력으로 치부되는 국책연구기관 종사자들의 집단이기주의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대덕단지 등 고급두뇌 집단의 활력 상실로 국가 경쟁력에 적신호가 켜진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김대중 정부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위원장 박익수)의 연구 과제인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최고 정책 결정자의 역할 이라는 보고서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임기가 2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시의적절한 연구로 높이 평가될 만하다. 경희대 송하중 교수(행정학)가 연구 책임자인 이 보고서는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대통령의 역할을 주도자, 추진자, 조정자의 세가지로 구분하고 이승만 대통령부터 김대중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의 과학기술정책에 대해 공과를 따지고 있다.
▼과학기술 정책 추진체계 미흡▼
이런 맥락에서 김대중 정부의 최대 문제점으로는 대통령이 위원장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체계가 미흡한 점이 지적됐다. 한 마디로 대통령의 과학기술 정책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집권 초기부터 자민련과의 공동정권으로 과학기술부장관을 자민련 인사 몫으로 내놓은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그 보다는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개혁의 청사진이나 이를 추진할 만한 인물들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의 역할이 별로 돋보이지 않았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제 임기 중에 반드시 과학기술 선진국의 초석을 굳건히 다질 것입니다. 김대통령이 2000년 과학기술인 신년인사회에서 연설하면서 한 말이다. 그의 다짐이 실현되길 바란다.
이인식(과학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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