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또래의 주먹만큼밖에 되지 않았던 고무공은 왜 그렇게 내 다리를 살살 피해다니는지…. 또 왜 그렇게 손에는 와서 닿는 것인지…. 또래들보다 덩치가 큰 편이던 나이기에 딱하기는 더했다. 우리 팀동료들은 숫제 나를 빼고 열명만으로 하겠다는 한심한 제의를 하기까지 하는 것이지만 상대팀에서 들어주지 않곤했다. 내가 뛰는 편이 그 친구들에게는 더 유리했으니까. 나는 그런 수준의 ‘축구치’였다.
그러나 인생 매사가 그렇듯 반전의 기회는 왔다. 중학교에 진학한 나는 농구를 익혀서 학교대표로 출전하는 등 상당한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는데 그 농구실력으로 해서 우리 하귀리 대표팀의 골키퍼로 선발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하귀리 팀은 제주시의 외도동, 화북동과 함께 제주도내에서 축구실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수준이어서 거기에 끼어든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영광이었다.
나는 골키퍼의 유니폼을 입고 고교 3년간 하귀리팀으로 뛰면서 축구에 대한 나의 오랜 콤플랙스를 씻어낼 수 있었다. 정말이지 화려한 변신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를 어쩌랴. 그 영광에도 역시 종말이 있었다. 고3이던 해의 여름, 중요한 대회의 예선전에서 나는 한 게임에 무려 네골을 먹고 말았다. 정말이지 악몽과 같은 게임이었다. 경기초반에 무리한 다이빙을 시도하다 무릎을 벗겨먹은 나는 내내 피를 흘리면서 뛰었지만 속된 말로 죽을 쑤고 말았다. 뛰쳐나가야할 때는 머뭇거리고, 나가지 말아야할 때는 서둘러 달려나가고, 펀칭해야 할 볼을 캐치하려다 놓쳐버리고, 잡아야할 볼은 편칭을 하다가 위기를 자초하고….
결국 게임은 0―4로 끝나고 말았고 나는 그만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그날 이후 나는 관전하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축구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