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최승자, 김혜순, 황인숙… 이들 90년대의 대표적인 여성시인들은 남성들의 세계에서 소외된 여성만의 내밀한 감성을 치욕이란 주제로 노래해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지난 90년대, 폭압으로 요약되는 남성성 때문에 고통받는 여성의 몸이 겪는 치욕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그것으로 더 이상의 치욕은 불가능할 것으로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적처럼 그 치욕이 부활했다. 구제금융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이념(남성) 부재의 시대를 살아가는 두 남자의 치욕.
문학동네 시집 시리즈로 나란히 출간된 김철식의 첫 시집 ‘내기억의 청동숲’과 박철의 다섯번째 시집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에는 황폐화된 사랑과 가난에 찌든 두 남자의 삶이 슬프게 그려져 있다.
전성기 시절 이문재의 아름답고 예민한 감각을 떠올리게 하는 김철식의 '내 기억의 청동숲'은 방만했던 청춘의 기억이 불러일으키는 우울한 치욕을 담고 있다.
‘기억이 우위를 장악하자 길을 잃은 치욕’(개의 자서전) 때문에 시인은 사랑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한 여자를 사랑할 때 그 여자를 사랑하지 못하게 했던 어떤 가족사에서 비롯된다. "이제 나 죽어야겠어요/ 그만 가야 해요//날 놔줘요 어머니(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시인에게 죽음은 치욕의 마지막 해결책이다. 그러나 여리고 섬세한 시인은 죽음을 헛된 꿈으로 그리워할 뿐이다. 왜냐하면 시인에게는 기분이 나쁘면 제 머리를 독침으로 찌르는 전갈 같은 오기가 없기 때문이다(독침). 시인은 단단한 자기의 혀를 깨물며 말의 세계에 중독된 혐오스런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한다(코브라).
하지만 '미선나무'는 아름다운 시다. "마음도 눈빛도 허술해지는/ 저녁 시간에만/ 외로움을 돌밭에 가둬둘 수 있어/ 잠시 스쳐가는 바람의 살결/…/뿌리마다 한 이름만을 새기고/ 밤의 깊은 곳에서/ 내 꽃부리는 미친 듯 소란스러워/ 아무도 마중 나가지 않으니(미선나무)."
시인이 ㄱ 이나 ㄷ 같은 자음에 경도될 때 그의 의식은 날카로운 비판에 머문다. 그러나 이 시는 부드러운 자음과 모음이 어울려 사랑에 빠진 한 청년의 내면을 울림 좋게 드러내주고 있다.
박철의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는 첫 시집 '김포행 막차' 이후 가난과 병에서 얻은 변두리 지역의 슬픔을 노래해왔던 시적 작업의 연장이다.
시인에게 가난은 치욕을 불러오는 촉매제다. 표제작에서 화자는 아내가 영진설비에 주라고 한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으로 술을 마신다.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을 가슴에 품고 화자는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를 절망적으로 노래한다.
김수영의 한 주제가 설움이었듯, 박철의 주제는 슬픔이다. 그 슬픔은 이제 슬프므로 슬프지 않은 경지까지(슬프므로 슬프지 않다) 이르렀다. 그러나 가난의 슬픔 속에서도 시인의 의식은 확연하다. 화자는 당구대에 붙어 있는 여자아이들을 관찰하며 이러다가는 ‘한미합방’이라도 되는 게 아닌지 의심한다(찐빵 찌는 세상). 찐빵처럼 잔뜩 부풀어 있는 세상에 그래도 시인만은 제모습을 간직하겠다는 의지가 시집 곳곳에서 읽힌다. 문학평론가 유성호씨는 이 시집을 "삶의 성찰적 기능과 역설적 희망의 담론을 추구한 귀한 시편"이라고 평가했다.
문학동네는 기성시인들의 첫 시집을 엮은 문학동네 포에지 시리즈로 홍신선의 ‘서벽당집’, 김진경의 ‘갈문리의 아이들’, 김형영의 ‘침묵의 무늬’도 함께 출간했다.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박철/ 문학동네/ 148쪽/ 5.000원: 내 기억의 청동숲/ 김철식/ 문학동네/ 140쪽/ 5.000원>
안병률 <동아닷컴기자>mokd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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