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민병욱/백악관 비품

  • 입력 2001년 2월 22일 18시 39분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딸 패티 데이비스가 아버지 재임 시절 자주 백악관 물품들을 훔쳤다고 고백해 화제다. 그는 최근 워싱턴포스트지에 편지 형식 기고문을 보내 “백악관 비품인 성냥, 남자 양말, 볼링 공, 메모첩 등을 몰래 자주 빼돌렸다”고 털어놓았다. 흔들의자 등 덩치 큰 물건도 빼내려 했지만 들키지 않고 운반할 엄두를 못내 포기했다는 말도 했다. 그는 클린턴 전대통령이 퇴임 때 백악관 물품을 빼돌린 게 말썽나 상원이 조사에 착수하자 자신의 ‘옛 범죄’까지 드러날까 두려워 먼저 양심선언을 한다고 밝혔다.

▷클린턴 전대통령의 퇴임 행각 때문에 패티씨의 양심선언이 나왔지만 ‘백악관 가족’들의 ‘정부 재산’ 멋대로 쓰기가 폭로된 건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워싱턴포스트와 월스트리트저널 기자였던 로널드 케슬러가 95년 출간한 ‘벌거벗은 대통령각하(Inside the White House)’에 따르면 존슨 전대통령은 퇴임 직전 백악관 물품을 열번 가량 비행기로 실어 내갔다고 한다. 그 중에는 가구뿐만 아니라 대통령 문장이 찍힌 넥타이 핀, 커프스 버튼, 여자 팔찌, 립스틱 보관함과 심지어는 대통령 전용기의 화장지와 비누도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케슬러씨는 대통령의 가족, 측근들도 백악관 물품을 집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폭로했다. 일부 측근들은 허세를 부리려고 친척, 친지에게 대통령 별장이나 백악관의 특별실에서 하룻밤 묵고 가도록 특혜를 제공하는가 하면 대통령 전용기에 태워 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대통령과 주변이 모두 권세에 취해 국민의 재산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썼고 그런 것이 습관화되다 보니 거만이 몸에 배었다”고 케슬러씨는 분석했다.

▷온 세계가 지켜보는 백악관 내부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한편 그런 일들이 결국 만천하에 공개되고 또 일부 양심선언까지 하는 풍토가 그곳엔 조성돼 있다는 것이 부럽다. 수천억원의 비자금을 만들어 갖고 나온 대통령들이나 아버지 권세를 업고 소통령 행세를 한 사람이 여전히 우쭐대는 우리의 풍토와 백악관 물품 몇 점을 빼낸 것을 늦게나마 뉘우쳐 양심선언하는 미국의 경우를 대비해 보면 답답한 느낌이 든다.

<민병욱논설위원>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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