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생활을 기대했는데 공원은 고사하고 쇼핑센터나 병원조차 없어 멀리 분당까지 원정가야 합니다.”
이씨는 지난해 용인시가 기반시설 미비를 이유로 뒤늦게 공사를 중단시킨 곳도 많아 산사태 등 수해 걱정 때문에 비나 눈이 많이 오면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23일 오전. 분당신도시에서 태재고개를 넘자 광주군 오포면 신현리 고개 정상에 우뚝 솟은 아파트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왕복2차로 도로 옆에 붙은 현대 모닝사이드 1차 아파트 공사 현장. 준농림지 야산을 파헤치고 618가구가 들어서는 이 아파트의 부지면적은 1만5000여평, 연면적 3만7700평. 그러나 이 아파트는 각각 300가구(연면적 2만2000평)와 318가구(연면적 1만5700평)로 나눠 건축허가를 받았다. 연면적 2만8700여평 이상이면 거쳐야 하는 교통영향평가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글 싣는 순서▼ |
1. 정치논리에 춤추는 개발 |
비좁은 도로 좌우에는 각종 음식점 가구점 공장 골프연습장이 한치의 빈틈도 없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실개천 옆으로도 연립주택과 전원주택 가구공장 등이 죽 늘어서 있다.
충북 지역. 중부고속도로에서 국도를 타면 느닷없이 논밭 한가운데 들어선 나홀로 공장이 자주 눈에 띈다. 이런 공장은 군단위에만 800개가 넘는 곳도 있다. 오염물질 배출시설을 갖추고 있다지만 실제로 가동하는 곳은 거의 없다.
이런 개발은 불법이 아니다.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 허술한 법과 제도의 틈새를 파고 든 결과다.
94년 도입된 개념인 준농림지는 ‘보전을 주로 하되 개발이 허용되는 곳’으로 모호하게 규정돼 마구잡이 개발의 온상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94∼99년의 6년 동안 준농림지를 개발하기 위해 준도시지역으로 용도 변경한 곳은 전국 1582개소 7000만평. 준농림지 상태에서 공장 숙박업소 주택 등을 지은 것도 30만건, 1억2200만평에 이른다.
조상들이 수천년 동안 사용했던 면적(전 국토의 5.1%)의 10분의 1 이상(0.6%)을 6년 동안 훼손하거나 개발해 버린 것이다.
특히 개발 시대에 만들어진 특별법들은 마구잡이개발의 주범이다. 주택건설촉진법은 20가구 이상의 공동주택을 지을 때 사업계획승인만 받으면 도시계획이용변경이나 용도변경 등의 절차를 면제받도록 하고 있다. 77년 주택이 극히 부족할 때 만들어진 법인데다 시군구가 허가권자라 무더기 허가의 근거가 됐다.
주택건설촉진법은 또 일정규모 이상의 개발에 대해서만 도로 학교 공원 등 기반시설을 갖추도록 하고 있어 ‘막개발’을 부추겼다.
용인시 서북부지역이 대표적 사례. 500가구의 아파트를 짓는데 8m의 진입도로만 설치하면 되다 보니 간선도로가 부족해 출퇴근 시간대에는 도심을 방불케 하는 교통체증이 일어난다. 분당신도시의 도로율이 19.9%, 일산신도시가 20.9%인데 반해 이 지역의 도로율은 1.8%.
건설업체의 한 간부는 “1000가구 이상은 유치원부지를 마련하고, 2500가구 이상은 초등학교를 설치해야 하는 규정을 피하기 위해 999가구나 2495가구를 짓는 것은 건설업계에서는 상식”이라고 말했다.
81년 도입된 택지개발촉진법은 공공기관이 대규모로 녹지 등을 훼손하도록 ‘뒷받침’하는 형국이며 중소기업창업지원에 관한 법은 농촌지역에 공장 건설을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환경영향평가제도도 사업시행자가 환경영향평가서를 환경부에 제출하기 때문에 큰 환경파괴를 수반한다 해도 사업 자체를 취소시킬 수 없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충북대 황희연(黃熙淵·도시공학과)교수는 “국토에 대한 장기 비전 없이 여론의 향방에 따라 그때그때 정책을 입안함으로써 국토이용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주거환경을 악화시켰다”고 말했다.
▼정부 법개정안 마련▼
정부는 최근 무분별한 개발을 막고 국토를 ‘선계획 후개발’하기 위해 국토 관련 제도를 전면 개정하기로 했다.
국토이용관리법과 도시계획법으로 이분화돼 있던 법을 국토이용 및 도시계획에 관한 법률로 일원화해 농촌도 도시처럼 미리 계획을 세운 뒤에야 개발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 골자다. 준농림지는 관리지역으로 만들어 절반 정도는 보존, 절반 가량은 계획적으로 개발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건교부는 국토 관련 법 개정안을 마련해 국회에 곧 상정할 예정.
그러나 이런 대책도 문제점이 많다는 것이 전문가의 진단. 우선 개발사업자가 환경영향평가를 하는 제도를 고쳐 최소한 공공기관이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환경단체들은 “준농림지를 당초 농림지나 자연환경보전지역으로 묶으려다 관리지역이라는 애매한 테두리로 엮은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관리지역은 계획 생산 보전의 3가지로 나눠지며 준농림지와 마찬가지로 개발 또는 보존이 가능하다. 다만 이번에는 각각의 기준을 만들어 특정 조건의 지역은 반드시 보전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 정부의 구상.
그러나 시행 단계에서 이해 당사자의 입김에 따라 지자체가 보전지역을 최소화하고 개발지역을 늘릴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결국 정부의 마구잡이 개발대책이 국회를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지, 앞으로 남은 세부지침들이 얼마나 기본 취지를 살릴지가 과제다.
▼특별취재팀▼
정성희차장(팀장·이슈부)
신연수 구자룡기자(경제부) 정용관 황재성 이은우 김준석기자(이슈부) 이훈구기자(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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