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승련/서비스라는 것

  • 입력 2001년 2월 25일 18시 32분


제일은행 포스코지점 김준태 과장은 23일 오전 약속시간에 맞춰 서울 여의도에 나타났다. 기자는 전날 김 과장과의 첫 전화통화에서 “아파트를 담보로 잡힐 테니 3500만원을 대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 과장은 응낙했고 기자는 또 물었다. “제가 찾아가야 하나요?” 김 과장이 대답했다.“아닙니다. 제가 대출서류를 들고 손님께 가지요.”

여의도와 포스코지점이 있는 강남구 대치동은 한시간 거리다. 이 말을 듣자 며칠 전 홍콩상하이은행(HSBC)의 존 블랜손 한국대표가 아파트담보대출 세일즈를 위해 동아일보 금융부를 찾아온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경쟁이 좋기는 좋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김 과장은 이 때까지 대출요청자의 신분이 동아일보 금융부 기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

김 과장은 헤어지기 직전 “나와 거래를 터 줘서 감사하다”며 다소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앞으로 대출이 또 필요하다면 나에게 상담해 달라. 대출희망 금액, 이자율, 만기구조, 기타 비용을 고려해 제일은행이 아닌 다른 은행의 상품이 유리하다면 그것으로 골라 추천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은행이 “우리 상품이 최고다. 다른 은행은 감춰진 비용이 있어서 알고 보면 손해다”라고 주장해온 관행에서 보면 김 과장의 말은 파격적이었다. 외국자본이 들어온 후 제일은행의 정책이 바뀐 것이다.

미국의 메릴린치증권은 종합자산관리계정(랩어카운트)의 개설을 원하는 고객이 찾아오면‘메릴린치 상품의 편입비율을 20% 이상 넣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자기 상품을 더 팔기 위해 고객의 이익을 뒷전으로 미루는 일을 철저하게 차단하기 위해서다. 당장은 손해가 될지 몰라도 이런 경험을 한 고객은 오래도록 메릴린치의 고객으로 남는다. 선진금융의 첫째 조건은 ‘고객을 감동시키는 서비스’에 있다.

김 과장의 약속이 지켜질지는 앞으로 두고볼 일이지만 국내 소비자금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김승련<금융부 기자>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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