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같은 사실은 기독교대한감리회가 1892년부터 1934년까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미국 북감리교 소속 마티 윌콕스 노블 선교사의 일기를 미국으로부터 입수해 공개함으로써 밝혀졌다. 이 일기는 기독교대한감리회가 26일 발간하는 ‘3·1운동, 그 날의 기록’이란 자료집에 번역 수록됐다.
노블 선교사는 1919년 4월16일자 일기에 “화성 지역에서 제암리 이외에 16개 마을이 전멸되다시피 했다. 교회 터에는 재와 숯처럼 까맣게 타버린 시체뿐이었고, 타들어간 시체의 냄새는 속을 메슥거리게 할 정도였다”라고 참혹상을 적고 있다.
당시 화성에서 일본 군경이 교회 등에 방화한 사건은 근처 다른 마을에서도 일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100여명이 죽었다는 것이 노블 선교사의 목격담이다.
노블 선교사는 아펜젤러 목사(배재학당 설립자)의 뒤를 이어 1902년부터 서울 경기 지역 감리교의 책임을 맡았던 윌리엄 아더 노블 선교사의 부인이다. 그녀는 한국에서 보낸 42년 동안의 생활을 6권의 일기로 정리했는데 그 가운데 이번에 번역된 것은 1919년 3∼5월분이다.
노블 선교사는 이 일기에서 당시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조선총독이 서양 선교사들을 상대로 사건의 은폐 무마를 시도했다고 폭로하고 있다. 1919년 5월15일 일기에 “총독은 교회재건을 위해 교회당 500엔을 지급할 것을 약속하고 그 대신 이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그는 3월2일 일기에 고종황제 독살의 배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일기는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분리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내용의 문서에 사람들은 거의 억지로 서명할 것을 강요받았다. 고종 황제는 격노해 서명을 거부했고, 그러자 서명을 강요하던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까 두려워 전 황제(고종)를 독살하고 상궁을 죽였다. …윤덕영과 호상학”이라고 적었다.
윤덕영은 당시 최고실력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호상학은 내시였다. 노블 선교사는 이들을 배후인물로 지목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