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반포 상가 맥줏집 문을 열고 나와/잠수교 밑으로 내려가면, 거기/바다, 바다가 있지….’
시인 황지우가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을 추모해 지은 시의 한 구절엔 느닷없이 구반포 통닭집이 나온다. 김현이 작고하기 전 문인들과 어울려 드나들었다는 집 근처 구반포상가의 ‘반포치킨’이 그 곳에서 23년 전 문을 연 뒤 지금도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국립묘지를 지나 강남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서초구 반포본동 구반포아파트. 74년 준공된 이 아파트 역시 이 오래된 치킨집처럼 한결같다.
허름한 간판의 상점들이 나지막이 이어져 있는 상가와 그 뒤로 빛 바랜 주택공사 마크의 회색빛 저층아파트들. 흡사 70, 80년대에 시간이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과 함께 고풍스러움 마저 발산한다.》
70년대 초 서울 강남에 본격적인 아파트 시대를 도래하게 한 구반포아파트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원조격이라 할 만한 곳이다.
그런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일까. 주민들의 아파트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지은 지 20년도 채 되기 전에 재건축을 추진하는 인근 아파트 단지들과 달리 구반포는 30년이 다 돼가도 재건축 움직임이 일지 않고 있다. 반포로를 사이에 두고 남쪽의 22평형 아파트들만 일부 재건축 계획이 추진되고 있을 뿐 맞은 편의 30평∼60평대에서는 재건축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전혀 없다.
주민들이 “서울시내에 이처럼 쾌적한 환경을 갖춘 아파트가 없는데 뭐하러 재건축으로 이 좋은 환경을 망치느냐”고 입을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내 7개의 공원을 비롯해 아파트 키보다 높게 자란 20년 이상된 아름드리 가로수들. 가구당 1대 이상의 주차공간이 나올 정도로 널찍한 주차장과 여유로운 아파트 배치도 인근 아파트들의 심각한 주차난을 딴 세상 얘기로 들리게 한다.
20년째 살고 있는 주민 엄혜경씨(52)는 “건설 당시 워낙 튼튼하게 아파트가 지어져 지금도 벽에 못이 잘 안 들어갈 정도”라며 “내부 보수만 잘 하면 앞으로도 20년 이상 사용해도 끄떡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도심이나 강남으로 통하는 사통팔달의 교통과 단지 내 일급 초중고교가 갖춰져 있는 교육환경, 인근의 한강시민공원과 산재한 쇼핑시설도 한번 입주하면 이 곳을 다시 뜰 수 없게 만드는 환경들.
덕분에 구반포는 재건축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도 42평형이 6억∼6억6000만원에, 62평형이 최고 9억원을 호가할 정도로 강남에서도 가장 비싼 아파트에 속한다.
단지 내 하나부동산 대표 이광용씨는 “대부분 자체적으로 내부인테리어 시공을 하고 배관까지 뜯어고친 집들이 많아 굳이 재건축을 안 해도 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재건축을 ‘마다하는’ 주민들의 특성은 직업분포에서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반포본동사무소 황규태동장은 “70% 이상이 20년 이상 거주자들로 특히 아파트의 조용한 환경을 선호하는 교수, 법조인, 군장성, 퇴직한 고위관료 등이 많다”고 말했다.
추경석 전 건설교통부장관, 최광 전 보건복지부장관, 명지대 연하청 교수, 이광학 전 공군참모총장, 이종찬 전 대검중수부장, 수필가이자 서울대명예교수인 피천득씨, 서울대미대 부수언 교수, 서강대 이상우 교수 등을 비롯해 많은 정 관 학계 저명인사들이 이 곳 주민이다.
부수언교수는 “70년대 분양 당시 학교에서 가까운 곳을 찾아 많은 교수들이 이 아파트에 살기 시작했다”며 “서울 도심에서 이렇게 조용하고 쾌적한 아파트 단지는 찾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박윤철기자>yc97@donga.com
◇신구반포지역(주공 1~3단지) 아파트 시세
평형
매매가
전세금
구반포
(주공1단지)
22
2억6000만∼2억6800만
9000만∼9500만
32
3억7600만∼4억6200만
1억5500만∼1억6500만
42
5억8000만∼6억6500만
2억5000만∼2억7000만
62
8억5000만∼9억3000만
3억3000만∼3억5000만
신반포
(주공2단지)
18
2억∼2억1000만
7500만∼8000만
25
3억1500만∼3억2500만
1억1000만∼1억2000만
신반포
(주공3단지)
16
2억1000만∼2억1500만
6500만∼7000만
25
3억6000만∼3억7500만
1억1000만∼1억2000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