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 내 딸 경희 맞아?”
모녀는 할말을 잊고 오열했다. 딸은 69년 대한항공(KAL)기 피랍사건 당시 스튜어디스였던 성경희(成敬姬·55)씨. 어머니는 그 딸을 가슴에 묻고 30여년을 살아야 했던 이후덕(李後德·77)씨. 분단의 비극이, 냉전의 고통이 이토록 클까.
딸이 납북된 이후 이씨는 수도 없이 울었다. ‘북에서 결혼을 했다더라’, ‘대남방송 아나운서로 활동한다’더라는 등 딸에 대한 온갖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이씨는 가슴을 쥐어뜯어야 했다. “왜 하필이면 내 딸이냐”고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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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딸이 26일 평양 고려호텔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이씨는 30년 한이 한꺼번에 풀리는 것 같았다. 가슴에 걸려 있던 큰 돌덩어리가 비로소 내려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젠 여한이 없다. 이제 더 이상 뭘 바라겠어. 너 만나려고 3월15일 한다는 서신교환 대상에도 뽑혔는데 혹시 둘 다 안 해줄까봐 빼달라고 했어.”
스물세살 꽃다웠던 딸의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딸인들 이산의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웠을까. 이씨는 딸의 얼굴을 비비며 울었다. “얼굴에 점이 없었는데…” 이씨는 쏟아져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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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딸을 만나기 전까지도 행여 딸에게 해가 될까봐 “아무 얘기도 안하고 듣고만 있어야지” 하고 다짐했었다. 납북소식에 미친 듯이 길거리를 헤매던 일, 딸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79년 세상을 뜬 남편, 기관원들의 집요한 감시 등 그동안 자신이 당했던 고통을 생각했기 때문.
하지만 딸을 본 순간 30여년의 설움이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눈물을 감추려 테이블 위에 얼굴을 파묻었지만 자신에게 큰절을 올리는 딸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곁에는 김일성종합대 교수인 사위 임영일씨(58)와 젊은 시절의 딸을 쏙 빼닮은 손녀 소영씨(26)와 군복 차림의 장성한 손자 성혁(24)씨가 서 있었다.
소영이가 “작년 말 꿈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가 손을 꼭 잡더니 ‘할머니가 평양에 온다’고 알려줬어요”라고 말하자 이씨는 “남쪽에 있는 막내딸도 비슷한 꿈을 꿨다던데…”라며 또 울먹였다.
함흥이 고향인 이씨는 1948년 먼저 월남한 남편을 찾아 젖먹이 큰딸 경희를 업고 38선을 넘었다. 천신만고 끝에 남편을 만난 이씨는 2남3녀의 다복한 가정을 이뤘고 큰딸은 이화여대를 졸업한 뒤 KAL 승무원이 됐다. 하지만 행복은 69년 KAL기 납북으로 깨졌다.
납북된 후 딸 경희씨는 대남 방송(구국의 소리 방송) 요원으로 일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특히 북한 당국은 경희씨가 남한에 대한 미련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김일성대 교수와 결혼시켰다고 92년 자수 간첩 오길남이 전하기도 했다.
이들 모녀를 포함한 제3차 이산가족 교환방문단은 이날 서울과 평양에서 그리던 혈육과 감격의 상봉을 했다. 이들은 27일 4, 5차례의 상봉 기회를 더 갖고 28일 귀환한다.
<이철희기자·평양〓공동취재단>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