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은 96년 신한국당 사무총장이었던 강의원이 안기부로부터 국고수표 1000억여원을 받아 주씨를 통해 세탁한 후 당 선거자금으로 썼으며, 그 사례로 주씨에게 2억원을 주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강의원은 “돈을 준 건 사실이나 세탁 사례비는 아니다”고 항변했다. 자신의 선거운동에 주씨가 사재를 쓴 걸 알고 당 자금에서 이를 보전해주었을 뿐이란 얘기다.
▼선거법은 안중에도 없어▼
국민 세금으로 조성한 국가 예산을 정말 특정 정당의 선거자금으로 썼다면 이야말로 아연 실색할 일이다. 여야가 그 진위와 경위를 가리는 작업을 정쟁거리로 변질시켜서도 안될 일이다. 국민이 피땀 흘려 번 돈을 나라살림한다며 세금으로 거둬가 여당 선거비로 쓴 의혹이 있어 그 전모를 밝히자는 게 어떻게 정치싸움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나는 여기서 ‘안기부 돈’, 그 큰 덩어리를 둘러싼 여야의 다툼을 얘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강의원이 주씨에게 억대의 돈을 준 것이 안기부 예산 세탁 사례비 명목만 아니라면 문제가 없는지 분명히 짚어봐야 옳다는 생각이다. 강의원의 해명을 액면 그대로 들어준다 해도 이 또한 아연 실색할 일이기 때문이다.
강의원은 총선 때 주씨가 자신의 사재를 털어 선거운동을 도왔다고 밝혔다. 그 규모는 1억원이 넘을 것이다. “기억은 안나지만 1억원 또는 2억원을 보전해주었다”고 한 말이 그걸 입증한다. 그렇다면 강의원은 당시 선거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을 시인한 셈이다. 서울서 근무하는 주씨를 공식 선거운동원으로 등록했을 리 없고 그런 그가 강의원 말마따나 “대신 지역구를 들락거리며, 사재를 털어” 선거운동을 했다면 이는 중대한 선거법 위반이다.
주씨를 선거운동원으로 등록했더라도 역시 선거법과 정치자금법을 위반한 것이 된다. 강의원 말의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우선 주씨가 선거비용으로 쓴 돈이 정식 후원금으로 입금되지 않은 게 분명하다. 또 그 돈을 선거 후 선거비용으로 계산해 선관위에 보고하지 않은 것도 틀림없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선거 후 그 돈을 은밀히 보전해줄 이유가 없다.
더욱 한심한 것은 강의원이 주씨에게 준 돈이 ‘당의 자금’이라고 밝힌 부분이다. 당 차원의 선거운동이 아닌 개인의 선거운동을 도왔다고 하면서 아무리 사무총장이라지만 당의 자금을 제 돈처럼 내줄 수 있는 것인가. 당시 신한국당의 회계는 그 정도로 엉터리였는가. 몰래 쓴 개인 선거비용을, 1억∼2억원씩 사무총장이 멋대로 당의 자금으로 갚아주었다는데 당은 그 사실을 알고나 있었는가. 당도 모르게 집행됐다면 그건 횡령이 아닌가.
‘1억원 또는 2억원’ 부분도 그렇다. 도대체 얼마나 돈 개념이 없기로 억대의 돈을 주면서 1억원인지 2억원인지 기억이 안난다는 말을 하는지 아연 실색할 뿐이다. 투명하게 당 살림을 관장해야 할 사람이 당의 돈을 내주면서 1억원을 주었는지 2억원을 주었는지 모른다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강의원의 말은 설득력이 없다. 둔사로 들린다. 물론 그의 해명은 고도로 계산된 초점 흐리기 전략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5년이나 지난 총선 때의 일부 부정을 슬쩍 털어놓음으로써 안기부 예산을 세탁해 당의 선거자금으로 썼다는 검찰 주장을 희석시키는 효과를 노렸을 수 있다. 총선 때 유입된 안기부 돈이 예산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려 애쓰는 한나라당의 전략과도 맞아떨어진다.
▼언제까지 강의원 보호하려나▼
여기서 우리는 정치인들의 ‘포괄적인’ 법의식 문제에 부닥친다. 안기부 예산을 갖다 쓰지 않았다는 점만 강조하려다 강의원은 선거법 등을 위반한 사실을 아무 것도 아닌 양 털어놓았다. 그런 의식을 갖고 있으니 검찰의 소환에는 불응하고 재판에는 민주화 시위라도 하듯 동료의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선거법 위반은 그렇다쳐도 자신의 선거비용까지 당 자금으로 보전했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강의원을 한나라당도 언제까지 보호만 할 것인지 궁금하다.
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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