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학수/공허한 ‘국민과의 대화’

  • 입력 2001년 3월 2일 18시 36분


‘국민과의 대화’는 지난해 말에 있었어야 했다. 경제적 절망감, 정치적 불안감이 극에 달했을 때, 그러나 대조적으로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자랑스러운 노벨평화상을 받고 돌아왔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 앞에 나타났어야 했다. 그래야 위기에 맞선 김대통령에게 주목할 수 있었다.

▼방송 3사 총동원 자제해야▼

불행하게도 3·1절 저녁 두시간에 걸친 긴 대화에도 불구하고 국민에게 남겨진 인상은 매우 공허한 내용일 것 같다. 예컨대 김대통령은 많은 사안에 대해서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한 것으로 보아, 국정운영을 여론조사에 의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여론조사는 조사 방법과 시기 등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다를 수 있는데도 ‘국민의 90%가 찬성했다’는 식으로 단순화한 것은 문제가 있다. 그리고 대통령이 과거에 보여줬던 거침없고 정연한 논리, 여유와 패기가 많이 사라졌다는 인상을 주었다. TV를 지켜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 경우도 가끔 있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남은 임기 2년 동안 나라를 이끌어갈 새로운 국정 어젠더를 들고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라에 변화와 희망을 주고, 국민의 힘을 결집하기 위해서는 정치지도자가 끊임없이 새로운 국정 어젠더를 개발하고, 그것을 개념화해 기치(旗幟)로 내걸어야 한다. 그런 어젠더도 없이 공중파 방송 3사의 휴일 밤 황금시간대를 모두 점령하는 것은 정말 재고해야 할 일이다.

노태우 정권 시절에 공중파 민영방송인 SBS를 허가한 명분은 프로그램의 다양성 확보와 국민의 알권리 확장이었다. 그렇다면 공영방송인지에 대한 정체성 위기에 놓여 있는 MBC는 차치하더라도, 민영방송인 SBS는 노조의 주장처럼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내보냈어야 했다. 엄격하게 말해서 그것이 진정 방송의 공익성을 살리고, 대통령과 정권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는 길이다.

이제 대통령이 등장한다고 해서 무조건 공중파 방송이 총동원되는 일은 자제돼야 한다. 특히 국가적 위기상황도 아니고, 나라의 시대적 패러다임을 바꾸는 어젠더도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필요하다면 전국을 시청권으로 하는 KBS의 두 채널을 활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굳이 이번 국민과의 대화에서 얻은 소득을 말한다면, 경제회복이 국민의 가장 큰 관심거리라는 사실을 재확인했다는 점이다. 정치적 자유가 폭넓게 향유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적 관심은 생활과 직결된 경제문제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경제문제는 모든 것이 얽혀 있는 사회적 시스템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 국민을 향한 설명이 결코 쉽지 않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질문에 일일이 답변하기보다 스스로 대화마당을 이끌어가는 주재자의 역할을 했어야 했다. 사실, 대통령이 전지전능한 힘과 능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닌 마당에 해결방안을 언급해봤자 정부의 거듭된 주장을 지루하게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國政어젠더 제시 필요▼

그렇다면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의식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각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오히려 대통령이 국민에게 의견을 묻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더 바람직스러웠을 것이다. 실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1992년 말 대통령 당선 뒤 스스로 사회자로 활동하는 타운미팅을 미국 공영방송인 PBS를 통해 이틀간 개최해 당시의 심각한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한 국민적 동참을 이끌어내는 지혜를 보여주었다.

이제 방송을 통한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는 세가지 방향으로 고쳐져야 한다. 첫째, 국민을 시청자 포로(captive audience)로 만드는 공중파 방송 3사 동원체제를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방송에서도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둘째, 일부 참석자의 질문에 대통령이 답변하는 획일적인 형식을 벗어나, 오히려 대통령이 자유토론을 이끌어가는 형식으로 전환돼야 한다. 그래야 국민의 참여가 살아나고 재미있는 토론방송이 가능하다. 셋째, 국민을 결집시키고 나라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새로운 국정 어젠더를 들고 나와야 한다. 그래야 전국민과의 대화에 걸맞은 대통령의 권위와 가치가 살아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김 학 수(서강대 교수·정치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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