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사후 피임약’은 여성 잡는 독극물?

  • 입력 2001년 3월 4일 18시 49분


직장인 H씨(28)는 지난 2월 초 뜻하지 않게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가진 뒤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공교롭게도 배란기였기 때문. 임신이 두려웠던 그는 다음날 약국에서 ‘사후(事後) 피임약’이라며 건네준 주황색 알약을 먹고는 이틀 뒤부터 1주일간 지속적인 하혈에 시달렸다. 결국 H씨는 산부인과 신세를 져야 했다.

일반 피임약이 원치 않는 임신을 막는 사후 피임약으로 둔갑해 마구잡이로 오남용되고 있다. 여성들 사이에 ‘응급 피임약’으로 통하는 이 약들은 실상 ‘쎄스콘’ ‘미니보라’ 등 일반 경구용 피임제. 통상 정상적인 피임을 위해선 21일간 매일 한 알씩 먹어야 하는 것이 이들 약의 정해진 용법이지만 실제 약사들이 ‘사후 피임용’으로 권하는 복용량은 사용설명서에 기재된 안전 용량의 2배에 이른다. 이는 상습 복용할 경우 여성 건강을 크게 해칠 수 있는 수준.

안전용량 무시 과다복용

그러나 이 약들은 아무런 제재조치 없이 버젓이 팔려나가고 있다. 2월22일 기자가 한 20대 여성과 동행해 젊은층이 자주 찾는 서울 신촌-강남 일대 약국 여섯 곳을 취재한 결과 이중 네 곳에서 아무 거리낌없이 과량복용을 권하는 약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성관계 후 72시간 이내에 두 알 먹고 12시간 후 다시 두 알 드세요.”(‘쎄스콘’을 내준 신촌 S약국 40대 여약사)

“아직 72시간 안 지났죠? 21일간 매일 한 알씩 먹고 나면 3일 뒤 생리가 시작될 겁니다. 응급 피임 한 번 정도는 (몸에) 괜찮아요.”(‘미니보라’를 내준 신촌 I약국 약사)

사후 피임약이 없다고 답한 약국은 단 한 곳. 부작용을 말해준 약국은 아예 없었다. 신촌 Y약국에서는 “효과를 장담할 순 없지만 꼭 필요하다면 약을 주겠다”는 말을 했다. 심지어 압구정동 C약국은 비닐봉지에 쎄스콘과 통경제(생리불순 치료제), 비타민C를 섞어 미리 ‘세팅’해둔 약을 내주기까지 했다.

현행법상 사후 피임약의 판매는 불법. 때문에 상당수 약국들은 의사의 처방전 없이 구입 가능한 일반 피임약의 복용량을 대폭 늘려 사후 피임효과를 노리는 편법 판매를 일삼고 있다.

문제는 이들 약의 남용 폐해가 간단치 않다는 점. 자궁내막 상태를 불안정하게 유도해 수정란 착상을 방지하는 일반 피임약의 주성분은 호르몬제여서 일시에 다량의 호르몬이 투여되면 신체기능 이상을 부르기 쉽다는 게 전문의들의 공통된 견해다.

“일반 피임약을 고용량 복용하는 사후 피임법이 의학 원리상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사후 피임효과 자체에 대해 분명히 알려진 사실은 없다. 때문에 환자에게 자궁관련 병력이 있는지, 출혈 성향은 없는지, 현재 어떤 질환을 앓고 있는지 등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함부로 시도되는 사후 피임은 분명 위험하다.”

연이산부인과 박정순 원장은 “일생에 한두 번의 사후 피임은 괜찮을지 모르나 과량복용이 반복되면 부정 자궁출혈과 배란장애가 빈발하고 난소기능에까지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실제 피임약 남용 피해로 뒤늦게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많다”고 귀띔한다. 물론 간혹 산부인과에서도 사후 피임을 위해 성관계 후 72시간 이내에 유효한 착상방지 주사를 놔주기도 하지만 이는 의사의 진찰과 처방을 거치므로 무분별한 피임약 남용과는 차이가 있다.

약국에서 피임약과 함께 곧잘 내놓는 통경제의 오용도 위험수위다. 통경제 ‘사루비아’의 경우 사용설명서에 ‘임신중엔 유산의 우려가 있으므로 임부 또는 임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여성은 복용을 금한다’는 경고문이 있지만 강제생리를 유도하는 통경 효능을 역이용해 사후 피임용으로 팔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 피임약과 통경제의 혼용에 대한 임상실험 결과는 전혀 나온 바 없다.

‘사루비아’ 제조업체 삼천당제약㈜ 관계자는 “사루비아는 비호르몬성 통경제여서 피임효과가 없다. 하지만 시중에서 오용되는 사례가 잦고 관련 민원도 잇따라 약국측에 사후 피임용으로 판매하지 않도록 수시로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무책임한 피임약 편법 유통으로 인해 낭패를 본 여성은 한둘이 아니다. 실제 ‘여자와닷컴’(www. yeozawa.com)등 여성 사이트 게시판에서는 “약사가 사후 피임약이라고 해 복용했는데 결국 임신이 돼 인공유산을 했다” “사후 피임을 한 뒤 생리주기가 확 바뀌었다” “피임약을 많이 먹고 운전하다 쓰러졌다” 등 갖가지 피해사례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일부에선 공공연히 조제 판매도

복용 당사자의 신체적 피해와 함께 약국의 공공연한 조제행위도 문제다. 처방전 없이 약사가 직접 ‘세팅’한 약을 파는 행위는 의약분업 이후 임의조제에 해당하므로 명백히 불법이다. 이름 밝히길 꺼린 한 약사(50)는 “사용설명서 범위를 넘어선 고용량 복약지도는 약사로서의 도덕성을 저버린 행위”라며 일부 약사들의 무책임한 피임약 판매행위를 꼬집었다.

그렇다면 관계기관인 보건복지부는 이같은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런 일이 있는가? 전혀 몰랐다.” 보건복지부 여성보건복지과 관계자의 말에서 보듯 피임약 편법 유통과 오남용에 대한 당국의 관심은 뒷전이다.

대한약사회 관계자 역시 “우리는 단속 권한이 없다. 관할 보건소에 알아보라”며 책임을 떠넘겼다. 서울 강남구 보건소측도 “약국 점검은 보건당국의 특별지시나 제보, 진정 등에 근거해 불법조제행위 위주로 이뤄진다”며 “피임약 편법 판매에 대한 단속실적은 단 한 건도 없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지만 아직 공식 제품화된 사후 피임약의 국내 판매 허용 여부는 불투명하다. 한국의 한 해 낙태건수는 무려 150만건(의료계 추산). 인공임신중절률을 낮추기 위해서라도 조속히 판매해야 한다는 여성-의학계의 주장에 대해 종교계 등에서는 생명존중 차원에서 사후 피임약 사용은 ‘화학적 수단을 이용한 낙태행위’라며 강력한 비판으로 맞서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런 논쟁의 소모성 여부와는 무관하게 공공연히 이뤄지는 피임제 편법 유통은 가임 여성들의 건강을 여전히 심각한 위해 속에 무방비 상태로 팽개치고 있다.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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