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규민/방화범과 라이언일병

  • 입력 2001년 3월 8일 18시 31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가 있다. 관객을 압도하는 잔혹하고 사실적인 전투 장면 때문에 전세계 영화팬을 전율케 했던 드라마다. 전쟁에 보낸 4형제 가운데 3명의 전사통지서를 받아야 하는 어느 어머니를 위해 미군 당국이 적진에 남겨진 막내(라이언 일병)를 구해 고향에 돌려보내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일등병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대위가 지휘하는 8명의 특공대가 투입된다는 점이다. 특공대는 사투 끝에 임무를 완수하고 모두 장렬하게 전사한다.

▷라이언 일병이 그 어머니에게 소중한 자식인 것과 마찬가지로 8명의 특공대원도 모두 그들의 부모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한 명의 저급 병사를 구하기 위해 8명의 고귀한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 설득력 없어 보이지만 논리성만 따지다 보면 군 조직은 유지될 수 없다. 그래서 군인은 명령에 움직일 뿐 상황 앞에서 지시 이행 여부를 이론적으로 검토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서울 홍제동 화재로 6명의 소방관이 순직한 데 이어 부산에서도 또 한 명이 화재 현장에서 희생됐다. 우연히도 두 사고 모두 방화에 의한 화재였고 소방관들은 바로 그 방화범들을 구출하기 위해 불 속 깊숙이 들어갔다가 화를 당했다.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범죄인 두 명과 고귀한 소방대원 일곱의 인명이 맞바꿔진 상황에 분통해 하는 이들이 많다. 논리와 감정만으로 말하자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소방대원들이 현장에서 구조 대상의 존재 가치를 판단해 불길에 뛰어들지 여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범법자는 법에 의해 심판을 받을 뿐이지 소방관의 1차적 판결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라는 상관의 지시를 따른 특공대처럼, 희생된 소방관들은 어떤 인명도 소중하다는 하늘의 뜻을 목숨 바쳐 지킴으로써 사회 조직을 강건케 했다. 착한 사람들이 먼저 하늘의 부름을 받는 것은 애통하지만 그들의 희생은 그래서 더욱 빛이 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슬픔에 오열하는 가족들에게 용기를 주는 일은 순직 소방대원들에게 빚을 진 이 사회 조직원 모두의 몫이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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