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따져봤자 왕따만..." 어느 공인회계사의 수기

  • 입력 2001년 3월 8일 18시 57분


고백하건대 회계사가 ‘회계 조작’을 찾아내기 어렵다는 말은 순 엄살에 불과하다. 90년대 초부터 회계사로 일하면서부터 나는 기업의 회계조작을 수없이 발견했다.

S회계법인에서 대우그룹 계열사를 회계감사할 때다. 당시 가전대리점 주인들이 제품을 팔아 돈만 챙기고 잠적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면 본사가 가지고 있는 매출어음은 부도가 난다. 이렇게 휴지조각이 된 받을 어음은 내가 목격한 것만 라면박스로 2개 분량. 전체 받을 어음의 절반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그러나 회사는 규정대로 50%의 충당금을 쌓지 않고 1%만 쌓았다. 이 때문에 적자기업이 흑자기업으로 둔갑했다. 회계 담당자는 “세법상 이렇게 해도 된다”고 우겼다. 배짱 좋은 이 회사는 배당규모까지 공시를 통해 주주에게 약속한 상태였다. 당기순익을 미리 정해놓은 규모에 맞추기 위해 손실을 숨긴 것이다.

잘못을 지적한 문서를 몇 쪽 준비해 회계법인 내의 파트너(임원)에게 보고했다. 그는 “관행이니까 그냥 넘어가자. 밝혀지면 기업에 타격이 크다”고 했다. “이것을 바로잡아봤자 회사측에서 다른 항목에 손을 댄다”는 말도 했다.

팀원이던 7명은 고민했지만 대세를 따르기로 했다. “싸워봐야 귀찮기만 하다” “우리만 왕따 당한다”며 스스로 위로했다. 그러나 내 눈에도 이 회사는 장래가 없어 보였다.

세월이 많이 흘러 직장을 다른 S법인으로 옮겼지만 ‘적당히’ 관행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이달 초 감사를 마친 한 제약업체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 회사는 약국이나 병원에 약을 팔 때 주는 리베이트(판매장려금)를 판매비로 처리한 사실이 밝혀졌다. 회계기준은 리베이트를 매출차감항목으로 분류, 전체매출액에서 리베이트를 빼고 매출액을 계산하도록 돼 있다. 이 때문에 매출이 실제보다 5∼10% 가량 많게 보일 뿐만 아니라 매출이익률도 부풀려졌다. 회계담당 부장은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애원했고, “이미 추정이익을 공시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버티기도 했다.

파트너는 그냥 넘어가자는 눈치. 나도 결국 물러섰다. 그러나 “감사보고서에 내 이름을 넣을 수는 없다”고 우겨서 내 서명을 지워버렸다.

지난 10년간 달라진 것이라면 젊은 회계사가 버틸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밥줄’이 걸린 파트너는 고객회사에 변함 없는 약자였다.

<정리〓이훈·김승련기자>dreamla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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