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전진우/섹시(SEXY)

  • 입력 2001년 3월 9일 18시 44분


불과 한 세대전만 하더라도 우리네 미녀란 대체로 동그란 얼굴에 살집이 통통하고 복스럽게 생긴 여자였다. 후덕(厚德)해 보이는 것이 부잣집 맏며느리감이다 하면 최고의 찬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큰일날 소리다.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받는 것 없이 욕얻어먹기 십상이다. 요즘 최고의 찬사는 남녀 가릴 것 없이 섹시하다 인 것 같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기야 하겠지만 아무튼 성적 매력 이 최고 가치를 누리고 있는 세태인 것만은 분명한듯 싶다.

▷인도계 미국인인 올해 서른 넷의 신예 여성작가 줌파 라히리는 지난해 처녀작인 단편소설 '축복받은 집' 으로 2000년 퓰리처상과 펜, 헤밍웨이상을 받았다. 최근 국내에 소개된 라히리의 작품집에 '섹시' 라는 단편이 실려있는데, 작가가 이 작품에서 말하는 '섹시' 는 '잘 모르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 이다. 왜 그럴까.

▷스물 둘의 여주인공 미란다는 백화점 화장품부에서 데브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데브는 유부남이었지만 그가 "당신은 섹시해" 라고 말했을 때 미란다는 그 말이 '자신의 외투와 피부를 뚫고 직접 뇌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미란다의 직장동료 락스미는 자기 사촌 형부가 비행기에서 만난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걱정이다. 어느날 락스미는 어린 조카를 잠시 미란다에게 맡긴다. 그런데 일곱 살 짜리 사내아이가 미란다에게 "당신은 섹시해요" 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무슨 뜻이니?" 미란다가 묻자 아이가 한참만에 답한다. "아빠는 잘 알지도 못하는 섹시한 사람 옆에 앉았어요. 그래서 지금 엄마 대신 그 여자를 사랑하는 거예요. "

▷ 요즘 결혼한 세 쌍 중에 한 쌍꼴로 이혼한다고 한다. 결혼보다 동거를 선호하는 추세라고도 한다. 성(性)의 상품화가 일상의 모습이 된 가운데 어린 여중생까지 용돈이 궁하다며 '버젓한 아저씨들' 과 원조교제에 나선다. 시대가 바뀌면 사랑법도 바뀌기 마련이다. 그러나 '잘 알지도 모르는 사람' 을 사랑하는 '섹시' 의 시대, 사랑은 없이 성적 매력만 풍미하는 세상이라면 그 또한 슬프고 삭막한 일이 아니겠는가.

<전진우 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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